인왕산 수성동 계곡의 갈대밭에 선 이굴기.

"산에 가서 꽃을 들여다보려면 땅에 엎드려야 합니다. 굴기(屈己)해야 되는 거죠. '자기를 낮춘다'는 그 말을 필명으로 삼았어요."

시인 겸 출판인 이굴기(李屈己·55)가 산문집 '꽃 산행 꽃 시(詩)'(궁리)를 냈다. 지난 3년 동안 전국 여러 산을 돌아다니면서 고개 숙여 감탄한 꽃과 그 주변 풍경, 그리고 거기에 걸맞게 떠오른 시인들의 노래를 곁들여 빚은 산문집이다. 사계(四季)의 순환에 따라 저마다 우리의 산하를 물들이는 식물 40여 종을 글로 묘사하고 사진에 담은 책이다.

이굴기의 본명은 이갑수. 1991년 오늘의 작가상을 받은 시인이자 궁리출판사 대표다. 그는 "시인으로선 밑천이 다 떨어졌기 때문에 시를 작파한 지 오래됐다"며 손사래를 쳤다. "시 쓰기 대신에 4년 전부터 '꽃 공부'에 빠져들어 산다. 아직도 초보자라서 배울 게 많다. 주말에 함께 산에 가는 '꽃동무'들이 있다. 그이들과 함께 걷는 길이 곧 꽃길이다."

이굴기는 '지을 줄은 모르지만 읽을 줄은 안다'는 마음으로 자연의 시학(詩學)을 음미한다. 전남 장성의 백암산에 가선 '길마가지나무'를 처음 알게 되곤 이내 정을 주게 됐다고 한다. '길마가지'란 이름은 '꽃향기가 너무 강해 지나가는 길손을 막아선다'고 해서 붙은 것이다. 그는 남도(南道)의 산길에서 길마가지나무의 활짝 핀 꽃을 보곤 대뜸 서정주의 시 '동천(冬天)'을 떠올렸다. 노란 수술을 보며 '내 마음속 우리 님의 고운 눈썹'이란 시구를 읊었다.

이굴기는 "꽃이란 눈에 띄는 순서대로 피는 게 아니다"면서 고은의 시 '그 꽃'을 떠올렸다.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한/ 그 꽃'.

이굴기는 "꽃 이름 문맹으로 살다가 뒤늦게 꽃 이름을 배우며 하나씩 징검다리로 삼아 산을 오른다"며 "나무가 꽃으로 마무리되듯이 내 생각도 꽃을 볼 때마다 매듭을 짓는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