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조(王朝)를 부정한 독립혁명 250여년 만에, 미국은 미국식 왕조를 다시 세웠다."(CNN)
중간선거를 치른 미국에서 화제가 된 인물은 후보자들보다도, 후보 지원 유세를 다닌 힐러리 클린턴(67·민주) 전 국무장관과 젭 부시(61·공화) 전 플로리다 주지사였다. 야당의 압승으로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임기 말 권력 누수가 본격화할 것으로 예상되면서, 2016년 대선 선두 그룹인 이들의 현장 득표력이 곧 권력 풍향계가 된 것이다.
클린턴 전 장관이 민주당 의원·주지사 후보 45명을 지원하기 위해 다닌 전국 17주 선거 지역의 동선은 '대선 루트'를 방불케 했다. 각 후보가 바쁜 클린턴을 모셔가려고 수만달러를 내고 전세기까지 띄울 정도였다. 남편인 빌 클린턴 전 대통령 역시 전국 유세를 다니며 여전한 대중 영향력을 과시했다. 화려한 외형과 달리, 클린턴 전 장관의 선거 접전지 지원 유세가 큰 효력을 발휘하지는 못했다는 평가가 많다. 상당수 접전지에서 야당에 패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대선 후보 지지율 1위'를 고수하는 데는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이라고 미 언론들은 전망했다.
부시 전 주지사의 아들, 즉 부시가(家) 4세인 조지 P 부시(38)는 이번에 선출직인 텍사스주 토지집행관에 당선되며 정계에 입문했다. 그런데 현장에선 대선 주자인 아버지 젭 부시가 더 화제였다. 젭 부시는 멕시코 출신 여성과 연애결혼해 미국 내 늘어나는 히스패닉 유권자에게 어필할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다. 그는 공화당 후보 지지 연설에서 '기업의 영향력이 너무 크다'고 한 힐러리 클린턴을 겨냥해 "일자리를 만드는 건 기업"이라고 반박, 주변에서 "이미 대선 전초전에 나선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힐러리 클린턴과 젭 부시가 속한 가문은 미국 20세기 말 이후 최대 정치 명문가로 꼽힌다. 케네디·루스벨트·록펠러가에 이어, 부시·클린턴 성(姓)을 가진 이들이 최근 4반세기 동안 권력을 분점하다시피 했다. 미국에서 지난 10차례 대선 중 부시나 클린턴이란 성을 쓴 사람이 등장했던 선거가 7차례다. 2016 대선에서 두 사람이 맞붙는다면, 1992년 빌 클린턴과 조지 H W 부시 전 대통령이 맞붙었던 '남편-할아버지'에 이어 '아내-차남'으로 이어지는 클린턴가와 부시가의 리턴매치(return match·재대결)가 된다. 최근엔 미셸 오바마 여사의 상원 출마설로 '오바마가의 탄생'까지 거론된다.
미 언론과 브루킹스연구소 등 학계에서는 이런 현상을 아예 '미국식 왕조의 탄생'이라고 명명한다. 18세기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는 혁명을 통해 세워진 민주 공화정인 미국에서 '누구나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신화가 깨지고 있다는 것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양당제가 안착한 미국 정치의 필연이라는 해석도, 영국 등 유럽 왕실을 동경하는 등 정치 세습에 대해 거부감이 없는 미 유권자의 성향이란 분석도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