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창작을 해본 적이 없다. '예술은 창작이다'라는 등식이 나에겐 낯설다."

중견 화가 박영남(65)의 고백이다. '창작은 예술가의 소명'이라 믿는 이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는 당당하게 말했다. "내 작업은 지속적인 자기 복제의 과정이었다. 한 작품이 다음 작품의 모델이 된다. 작품이 작품을 낳는 셈이다."

서울 삼청로 금호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제목도 '자기 복제(Self Replica)'. 지난 28일 전시장에서 만난 작가는 "복제의 복제로 양산된 결과물이지만 단 한 개도 똑같은 것은 없다"고 했다. 1990년 시작했던 '블랙 앤 화이트' 연작을 비롯해 채색 작업 100점, 스테인드글라스 작품 등을 선보인다.

박영남의‘달의 노래’, 캔버스에 아크릴, 300×510cm, 2001.

그는 붓 대신 손으로 그린다. 쉽게 굳는 아크릴물감이 마르기 전에 손으로 펴고 밀고 문지르고 긁는다. 손등, 손바닥, 손가락이 모두 도구다. 바른 지 30분이면 물감이 다 마르기 때문에 빠른 속도로 여러 겹을 쌓아 중첩시킨다. 작가는 "내게 캔버스는 대지"라며 "간단히 측량한 후에 좌표값을 설정하고 색채를 선으로 나누며 화면을 분할한다"고 했다.

전시장엔 층마다 다른 스토리가 있다. 1층에선 지난해 겨울부터 10호짜리 캔버스에 선을 긋고 채색한 신작들을 만날 수 있다. 8개월 동안 200점을 그렸고 그중 100점을 추려 전시했다. 2층에는 '블랙 앤 화이트' 연작이, 3층에는 '고흐와 몬드리안의 합작' 시리즈가 걸렸다. 멀리 떨어져서 보면 차분하게 구획된 화면이지만 가까이서 보면 거칠게 쌓아올린 물감의 질감이 도드라진다. 지하 전시실에는 스테인드글라스 작품 '빅 애플(Big Apple)'을 설치했다. 작가는 1995년 오스트리아 수도원 공방에서 체류하면서 스테인드글라스 기술을 배웠다.

자연광 아래에서만 작업하는 그는 "아무래도 나는 인상파 시대에 태어났어야 했다"고 농했다. 해가 있을 때만 그림을 그리고 해가 지면 작업을 끝낸다. 그의 작품은 자연의 빛으로 색을 쌓아올린 결과물이다. '자기 복제'를 표방했지만 꾸준히 진화하고 있는 그의 작품 세계를 확인할 수 있다. 전시는 9일까지. (02)720-5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