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기아차그룹의 초대형 사옥이 들어온다니 다들 '대박 났다' 하지요. 하지만 한전은 당장 떠나가는데 현대차는 언제 들어올지 모르잖아요. 10조원 잔치에 우린 굶어 죽게 생겼습니다."

우상범(59)씨는 서울 강남구 삼성동에서 복집을 하며 아들딸을 다 대학에 보냈다. 1989년부터 시작한 장사는 굴곡 없이 안정적이었다. 그는 "IMF 때도 어려움을 몰랐다"고 했다. 한전 덕분이었다. 그의 가게는 한전 사옥 뒤편 골목에 자리 잡고 있다. "아무리 어려워도 전기는 안 쓸 수가 없잖아요. 더구나 한전은 공기업이니까 여기 상인들은 경기를 거의 안 탔지요." 그랬던 우씨가 25년 만에 처음으로 임대료 걱정을 하고 있다.

손님은 어디에 - 30일 오후 서울 강남구 삼성동 한국전력 본사 부지 인근 식당가는 한산한 모습이었다. 경기를 안 타는 안정적인 상권으로 유명했던 이곳 상가는 11월 말 한전이 완전히 떠나면 현대차가 입주하기 전까지 최소 8년간 공동화가 불가피한 상황이다.

현대차그룹이 '10조5500억원'을 들여 새 주인이 된 서울 강남구 삼성동 한국전력 부지 주변 상인들이 개업 이래 최악의 위기를 맞고 있다. 황금 상권이 보장된 지역에서 이런 역설이 생긴 것은 한전과 현대차가 바통 터치를 하면서 생기는 '시차(時差)' 때문이다. 한전은 11월 말이면 완전히 떠나지만 현대차는 빨라도 2022년에나 입주할 예정이어서, 최소 8년의 공동화(空洞化)가 불가피하다. 설상가상으로 평당 4억원이 넘는 거액에 부지를 사들인 정몽구 회장의 과감한 베팅 여파로 이 지역 임대료는 가파르게 오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7만9342㎡(약 2만4000평)의 한전 부지 인근에는 100여개 가게가 상가를 이루고 있다. 서울 남대문에서 옮겨온 한전 본사 새 사옥이 들어선 1986년부터 형성된 상가다. 95%가 식당·호프, 5%가 카페인 상가는 한전과 전력거래소, 동서발전, 한국수력원자력 직원들 덕분에 임대료 걱정 없이 지냈다. 그러나 한전을 제외한 다른 입주 기관은 이미 지방으로 이전했고 남은 한전 본사도 7일부터 전남 나주로 이전을 시작해 11월 말이면 모든 직원이 떠난다.

매상이 급감하면서 상인들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살길을 찾아나섰다. 고깃집 사장 황찬욱(49)씨는 9명이던 직원을 절반으로 줄였다. 황씨는 "평일 점심시간에 300명이 넘는 손님이 왔지만 요즘엔 50명도 채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20년째 삼계탕 가게를 해온 이종관(62)씨는 "자주 오던 단골 한전 직원이 '여기 있으면 장사도 안 될 텐데 우리랑 같이 나주로 가서 장사하면 안 되느냐'는 얘기를 했는데 고마워 눈물이 났다"며 "권리금이라도 챙기고 빠져나갈 수 있으면 당장 따라나서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했다.

상인들은 처음으로 상가번영회도 만들었다. 그전까진 장사가 잘돼 "굳이 상가번영회가 필요하냐"는 의견이 많았다. 상가번영회의 첫 사업은 상가 골목에 가로등을 설치하는 것. 상가번영회 총무 김태문(60)씨는 "왕복 14차로 영동대로 건너편 사람들은 이곳에 식당이 있는지도 잘 모른다"며 "한전 담벼락에 숨은 가게들을 손님들이 잘 찾을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가로등을 세우려면 건물주의 동의가 필요하지만 서명을 거절하는 건물 주인이 많다고 한다. 현대차가 입주하면 현재 3종주거지역인 상가 지역이 일반상업지역으로 용도변경이 돼 건물을 리모델링할 건데 가로등이 있으면 공사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다. 김씨는 "가만히 있어도 땅값이 오르는 주인들이야 급할 게 없다"고 말했다.

상인들은 공사 현장에 '함바집'(공사 인부 전용 임시 식당)이 들어오는 것도 걱정이다. 상가번영회 측은 "공사가 시작되면 함바집 규모를 최소화해 달라고 구청에 요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중국음식점을 운영하는 박주선(56)씨는 "그래도 인부들이 함바집에서만 식사를 하진 않을 테니 공사가 하루라도 빨리 시작되는 게 우리에게 좋지 않겠느냐"며 한숨을 내쉬었다.

강남구청도 상인들을 최대한 다방면으로 지원하고 있다. 지난 29일에는 한전 부지 근처 상인들을 대상으로 무료 경영 컨설팅을 해줬고 한전 부지 뒤편에 식당가가 있다는 표지판을 만들어주겠다는 약속도 했다. 조춘식 강남구청 신성장동력팀장은 "한전이 이전한 뒤 가능한 한 공백 없이 현대차가 들어오는 것이 최상의 해결책"이라며 "한전이 11월에 이전을 마치고 나면 빈 건물을 다른 업체가 활용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게 강남구의 방침"이라고 말했다. 심교언 건국대 부동산학과 교수는 "현대차가 한전 부지에 들어서기 위해 공사에 착수하더라도 돈을 버는 곳은 함바집이지 인근 식당이 아니다"며 "현대차가 들어올 때까지 버티는 방법밖에 없지만 10년이 더 걸릴 수도 있어 그마저도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