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미국 오리건주(州) 포틀랜드에 머물고 있다. '빠름에서 느림으로, 홀로에서 함께로, 복잡함에서 단순함으로'를 신조로 하는 '킨포크'라는 잡지가 탄생한 도시다. 이곳은 매주 500명 이상 젊은 인구가 유입되는, 미국에서 아주 뜨거운 도시 중 하나다. 거칠게 비유해 한국의 제주도 열풍과 비슷하다고 볼 수 있는데, 이유 역시 비슷하다. 대도시의 빠른 속도에 지친 젊은이들이 자신의 보폭을 찾아 떠나는 느릿한 도시라는 특징 말이다.

서울에 살면서 언제 봄이 왔는지, 가을이 끝났는지 모를 때가 많았다. 계절의 '처음과 끝'을 기상청의 미세 먼지나 황사 주의보 같은 것으로 알게 된다는 건 어떤 식으로든 삶에 결락(缺落)과 결핍을 만든다. 하지만 포틀랜드에선 나날이 물들어가는 단풍을 볼 수 있었다. 이유는 딱 하나였는데, 사방을 둘러봐도 어디에나 나무가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 런던 디자인박물관 앞의 벽돌담 골목. 사람들은 가을 낙엽 같은 색깔의 벽돌담을 지나 각자의 길을 간다. 영화 ‘세상의 모든 계절’의 주인공 메리는 자신에게 따뜻하게 대해준 부부의 행복한 모습을 바라보며 외로움을 느낀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버스 정류장 앞에 있는 단풍나무를 재미 삼아 찍기 시작했다. 모자를 뒤집어쓴 것처럼 꼭대기에 물들었던 주황색 잎이 2주일 사이 노랗고 빨간 털 스웨터를 걸친 것처럼 허리까지 내려와 있었다. 하늘을 꼭짓점처럼 찌를 듯 키 큰 나무들은 어디에서도 보였다. 비가 와도 우산을 쓰지 않는 포틀랜드에서 비는 '피해야 할 것'이 아니라 '맞아도 괜찮은' 어떤 것이었다. 비 오는 거리에서 우산을 든 사람을 한 명도 보지 못한 날, 나는 비에 대한 이 도시의 정의를 새롭게 썼다. 비는 구름이 아니라 햇볕이 스며 있는 하늘에도 늘 머무는 존재로, 이곳에서 우산 가게를 한다면 필시 망하고 말 것이다.

'세상의 모든 계절' 같은 제목의 영화를 보기에 포틀랜드는 가장 적당한 도시로 보인다. 여름은 40도까지 치솟는 더위로, 겨울은 후드 산의 빙설로, 가을은 온 도시를 폭격하듯 물들이는 단풍으로,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처음과 끝을 명백히 증언하기 때문이다.

별다른 정보 없이 보게 된 마이크 리 감독의 '세상의 모든 계절'에는 땀 흘려 밭을 일구고, 그곳에서 나는 농작물로 음식을 해 먹고, 수확할 만큼 작물이 모이면 친구들을 초대해 담소를 나누는 낙으로 사는 노부부와 런던의 아름다운 사계절이 등장한다. 영화 속 런던은 맛없는 음식과 우중충한 날씨와 비만 내린다는 악명을 벗고 밀레의 '만종' 같은 목가적 느낌마저 들게 한다. 하늘의 구름은 빠르지 않고, 부부의 대화는 느릿느릿하게 흘러가지만 끊이지 않는다.

톰은 환경을 위해 비행기 대신 기차 여행을 고집하는 지질학자이다. 그의 아내인 제리는 병원에서 일하는 심리 상담가다. 외아들 조이를 둔 노년 부부는 오랜 시간 서로를 아끼고 친구들을 사랑한다. 제리의 직장 동료인 메리는 이 부부의 오랜 친구이다. 하지만 그녀는 술에 취하면 횡설수설하거나 흔들리는 눈빛으로 늘 상대를 불안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이혼녀다. 그런 그녀를 늘 따뜻하게 맞는 톰과 제리지만 어느 가을, 줄곧 독신이었던 아들 조이가 여자 친구 케이티를 소개하는 자리에서 메리 때문에 문제가 생기고야 만다. 메리가 케이티를 질투하듯 비난한 것이다. 메리는 내심 조이가 자신과 데이트해주길 원해왔다. 늘 연민으로 메리를 따뜻하게 대하던 이 부부는 메리에게 크게 실망한다.

사실 이 영화는 외로움에 관한 이야기다. 술주정뱅이, 불면증 환자, 신경증까지 있는 메리는 외로운 여자다. 그녀는 행복한 부부를 친구로 두었지만 그들의 행복은 메리에게 조금도 옮아가지 않는다. 소박하고 건강한 식탁, 가족과 친구들을 챙기는 따뜻한 마음, 장성한 아들과 그 아들에게서 태어날 예쁜 손자와 손녀, 부부라는 이름의 동지애. 톰과 제리는 노년을 함께하며 사계절의 처음과 끝을 보고, 오래된 가죽처럼 낡아갈 것이다. 하지만 그런 행복은 지금 메리와 가장 먼 거리에 있는 것이다. 영화는 이 부부의 행복한 밥상 위에 앉아 있는 메리의 불안한 시선을 마지막까지 놓치지 않는다.

나는 메리를 생각했다. 그녀의 문제가 무엇이었을까 되짚었다. 문득 이 영화가 꼭 외로움에 관한 영화는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한 선배로부터 이런 얘길 들은 적이 있다. 고독과 외로움은 다르다고. 거칠게 말해 고독은 매우 자발적인 외로움 같은 것이란 얘기였다.

"고독은 누군가로부터 배제되어 생기는 외로움이 아니야. 스스로 선택한 외로움이지. 결국 고독은 나 자신을 향해 내적으로 집중하는 능력일 거야."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자신을 얘기하고, 댓글을 달고, '좋아요'를 누르는 SNS 시대에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어쩌면 고독이다. 과잉 소통은 역설적으로 외로움을 증폭시키고 고독을 점점 더 희귀한 것으로 만들었다. 이제 고독은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나, 모로코 사막의 하늘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 되었다. 메리가 만약 '외로움'이 아니라 '고독'을 느꼈다면 그녀는 그렇게 불안해하지 않았을 것이다. 혼자 길을 걷거나, 책을 읽거나, 사색하며 혼자만의 시간을 즐겼을 것이다. 자신의 증세를 타인에게 떠넘길 게 아니라 스스로 조금 더 고독해지려고 노력했다면 그녀의 삶도 분명 달라졌을 것이다.

내가 왜 먼 포틀랜드까지 왔을까 궁리해보다가, 어쩌면 그것이 내게 필요한 일정 분량의 고독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나는 공짜 와이파이와 인터넷이 되지 않는 곳을 찾아 들어가 그곳에서 자주 글을 썼다. 누구도 전화하지 않는 빈 스마트폰을 들고 산책하다가 생각이 날 때마다 동네의 나무나 길가의 꽃을 찍었다. 그렇게 평소보다 많아진 시간에 혼자 생각할 시간을 갖고 조금 더 많은 영화를 봤다. '세상의 모든 계절'에선 농장에서 일하는 노부부의 뒤로 호른 소리가 자주 들렸다. 그 소리가 무척 목가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가을이 깊어지고 있었다. 가을의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잠시 눈을 감고 내가 곧 보게 될 겨울의 시작이 어떨지를 상상했다. 전나무 꼭대기 위에 쌓일 눈을 상상하자 정말 오랜만에 '집에서 크리스마스트리를 만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의 모든 계절 - 마이크 리 감독의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