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iv style="text-align:center"><span style="padding: 0 5px 0 0;"><a href=http://www.yes24.com/24/goods/14865732?CategoryNumber=001001017001007001&pid=106710 target='_blank'><img src=http://image.chosun.com/books/200811/buy_0528.gif width=60 height=20 border=0></a></span><

한문학자인 강명관(56) 부산대 교수는 매일 오전 4시 반이면 일어나는 '아침형 인간'이다. 이른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면 책을 붙잡거나 글을 쓴다. 박사 과정에 들어갔던 20대 후반부터 30년 가까이 된 습관이다. "저녁에는 약속이다 뭐다 일이 많을 수밖에 없잖아요. 낮까지 일을 마치고, 밤 9시 반이나 10시면 잠자리에 들죠."

강 교수의 이런 습관은 1997년 '조선 후기 여항문학(閭巷文學) 연구' 이후 17년간 24권의 저작을 쏟아낸 지적 생산성의 동력(動力)이 됐다. 10만 부 넘게 팔린 스테디셀러 '조선의 뒷골목 풍경'과 수십 편의 풍속화를 통해 조선의 생활상을 들여다보았던 '조선 풍속사' 3부작까지 그는 그동안 주목받지 않았던 일상적 풍경들을 역사학의 주제로 복권시켰다. 양반이나 남성만이 아니라 서민과 여성도 그의 역사학에서는 당당히 주인공 대접을 받았다.

그가 올해 주목한 대상은 조선 후기 실학자인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1731~1783)이다. 정확히 말하면 조선 사신단의 일원이었던 숙부를 따라 중국 북경(北京)을 방문했던 1766년 무렵의 홍대용이, 24번째 그의 책의 주제다. 강 교수는 최근 발간한 '홍대용과 1766년'(한국고전번역원)에서 "담헌의 북경 여행만큼 조선 후기 지식인 사회에 큰 충격을 던진 경우는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18세기 들어 북경을 다녀온 사람들을 중심으로 '청을 오랑캐의 나라로만 볼 게 아니라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주장들이 조금씩 생겨났는데, 홍대용은 그 중심에 선 인물이다.

홍대용은 중국어까지 직접 익혀서 조선인 최초로 중국 지식인들과 국경을 초월한 우정을 맺었다. 게다가 그는 박지원, 박제가 등 젊은 개혁적 지식인 그룹과도 긴밀하게 교류했다. 그런 홍대용이 북경에서 주고받은 편지집과 필담록을 주변 친지들에게 보여주자, 당시 조선 문화계는 큰 충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결국 1778년 박제가, 1780년에는 박지원이 북경을 다녀왔고 이들은 '북학의'와 '열하일기'를 각각 발표했다. 강 교수는 "따지고 보면 '열하일기'라는 걸작의 탄생도 홍대용의 북경 여행이라는 밑거름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고 말했다.

이 책에서 강 교수는 두 달간의 북경 여행이 홍대용의 내면에 미친 영향을 면밀하게 추적했다. 당시 조선의 양반사회는 중국이 오랑캐인 청에 의해 짓밟히고 오염됐으며, 중국의 문명은 조선만이 계승했다는 화이론(華夷論)과 소중화(小中華)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 북경 여행 이전까지 홍대용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홍대용과 1766년’을 펴낸 강명관 부산대 교수는“조선 후기에 국경을 넘어선 한·중(韓中) 지식인들의 네트워크는 세계화의 시대에도 피부색과 인종, 언어를 넘어서는 개방적이고도 동등한 교류라는 과제를 던진다”고 말했다.

하지만 강희·옹정·건륭이라는 세 황제를 거치면서 절정기를 구가했던 청의 발전상은 그에게 신선한 충격과 당혹감을 동시에 안겼다. 북경 천문대에서 천체망원경을 통해 태양의 흑점을 관찰한 홍대용은 귀국 후 '의산문답'을 통해 자구 자전설과 우주 무한론을 주장했다.

이처럼 조선 후기 지식인들에게 북경 여행은 청을 정벌해야 한다는 '북벌(北伐)'에서 청을 배워야 한다는 '북학(北學)'으로 인식의 전환을 가져오는 계기가 됐다. 강 교수는 "우주가 무한하고 중심이 없다면, 중국도 마찬가지로 지구의 중심이라고 볼 수 없고 중화와 오랑캐의 구별은 무의미해진다"면서 "모든 문명은 나름의 가치를 지니고 싶었다는 걸 홍대용은 말하고 싶었을 것"이라고 했다. 강 교수는 내년에는 원고지 4000매 분량으로 '홍대용 평전(가제)'을 펴낼 계획이다. 앞으로도 개혁 군주가 아니라 현명한 보수로서의 정조(正祖), 성(性)과 사치·유행을 통해 들여다보는 조선 시대 풍속사 등 그의 연구과제는 산적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