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들은 지난달 중순 다국적 기업들이 국경을 넘는 내부 거래의 상세한 내역을 각국 정부에 1년에 한 번씩 보고하는 방안에 합의하며, 포괄적인 조세 회피 방지책 도입에 불씨를 댕기고 있다.
◆ OECD “기업 내부 거래 공개해라”…한국도 2018년부터 영향
OECD는 2012년부터 기업들의 조세 회피를 ‘세원침식과 이익이전(BEPS·Base Erosion and Profit Shifting)’이라 부르며 종합적인 대책을 마련하기 시작했지만, 글로벌 기업들의 조세 회피 문제가 주요국의 공식회의에서 주요 의제로 다뤄지기 시작한 것은 2013년 G20(주요 20개국)회의 때부터다.
각국 정부가 다국적 기업으로부터 세금을 제대로 걷지 못하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기업들이 국가별 매출 등 기본적인 자료조차 공개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OECD가 다국적 기업들의 내부 거래 내역을 요구하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보통 다국적 기업들의 조세회피는 국가·지역 간 ‘이익 이전(transfer pricing)’ 방식으로 이뤄진다. 세금이 높은 국가에서 벌어들인 수익의 대다수를 세금이 낮은 조세 회피처로 브랜드 사용료, 지적재산권료 지급 등의 명목으로 보내버리는 게 핵심이다. 문제는 기업들의 이익 이전이 얼마나 이뤄지는지에 대한 정보는 물론 기본적인 자료도 베일에 가려져 있어, 세금을 더 매기고 싶어도 정부가 압력을 가할 만한 공식적인 근거가 없다는 점이다.
스타벅스의 조세 회피 문제가 여론을 뜨겁게 달구던 2012년 11월. 영국 의회는 구글, 스타벅스 등 다국적 기업의 대외 정책 담당자들을 줄줄이 의회 청문회 증인으로 출석시켜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하지만 이들 담당자들은 의원들의 날 선 질타에도 한결같이 모르쇠로 일관했다. 영국 법인의 매출액을 묻는 기본적인 질문에도 “모른다”고 했다. 세금을 적게 낸다는 지적에는 “합법적으로 내야 할 세금은 다 내고 있다”며 시종일관 낮은 자세를 유지하는 한편, 종국에는 “앞으로 성실하게 세금을 내겠다”는 두루뭉술한 입장을 내놓으며 여론의 비난을 교묘하게 빠져나갔다.
OECD는 이러한 문제점을 해결하고자 ▲디지털 경제 ▲국제 조세조약 남용 방지 ▲기업과세 일관성 확보 등 ▲투명성 확보 등 다섯 가지 큰 주제를 잡고 내년까지 조세 회피 방지책을 도입하겠다는 계획이다. OECD의 새 규제는 일정 매출 이상의 기업에만 적용될 예정이지만, 삼성전자(005930), 현대자동차(005380)등 한국의 상당수 다국적 기업들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전망된다.
이와 관련, 정부 관계자는 “지금의 논의 속도나 시스템 구축에 걸리는 시간 등을 감안할 때 2018년쯤 돼서야 본격적으로 (내부거래 내역 보고 시스템을) 도입할 수 있을 것”이라며 “상당수 기업이 이미 관련 자료를 국세청에 제출하고 있기 때문에 기업들의 부담이 많이 늘어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 이중과세? 이중비과세?
조세 회피처에 묻어둔 수익에도 세금을 매기려는 각국 정부의 움직임에 대해 기업들은 ‘이중과세’라는 논리를 내세워 크게 반발하고 있다. 하지만 비판론자들은 수년간 제대로 된 세금 납부를 미뤄온 기업들이 사실상 ‘이중 비과세’ 혜택을 누리고 있다고 지적한다.
미국의 비정부기구(NGO)인 ‘조세정의를 위한 시민단체(Citizes for Tax Justice)’에 따르면, 애플이 조세회피처에 묻어둔 수익은 360억달러(약 38조원), GE와 마이크로소프트의 경우 각각 360억달러, 240억달러에 달한다. 이 밖에 제약업체인 화이자는 240억달러의 수익에 사실상 세금이 매겨지지 않는 것으로 추산된다.
조세 회피란 법을 직접적으로는 위반하는 역외 탈세(offshore tax evasion)와 달리 현행법의 테두리 안에서 법의 취지에 위배되는 방법으로 세금 부담을 줄이려는 것을 말한다.
기업들 입장에서는 ‘절세 전략’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만, 조세 회피 역시 역외 탈세와 마찬가지로 과세 기반을 잠식하고, 법질서 훼손하며, 사회적 위화감을 불러일으키는 등의 문제를 불러오기 때문에 서둘러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는 여론이 힘을 얻고 있다. 또한 일부 전문가들은 현실상 둘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도 많다고 지적한다.
시민단체나 정부 등이 구체적인 수치를 앞세워 조세 제도 개선 마련을 촉구하고 있지만, 기업들의 반발은 거세다. 회계컨설팅 업체인 어니스트앤드영(E&Y)이 올해 5월 25개국 다국적 기업 간부 83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1%가 “앞으로 3년간 이중과세 문제가 더 늘어날 것”으로 봤다. 또한 응답자의 68%는 과거 2년간 세무 당국의 조사가 더 엄격해졌다고 답했다.
각국 정부의 조세 회피 방지책은 잊을만하면 단골손님처럼 등장한다. 1990년대 후반에도 국제적으로 조세 회피 문제가 불거지며 각국 정부는 기업들의 납세 정보 공유를 골자로 하는 조세 협약을 맺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앞서 미국은 ‘국외계좌신고제도(FACTA)’ 등을 통해 세계 각국 금융기관에 세금 정보 공유를 요청하고 있다. 가뜩이나 경기도 어려운데, 정부가 짐을 더 얹어준다는 볼멘소리가 나오는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다.
하지만 기업들이 국경을 넘는 내부 거래를 통해 조세 체계의 구멍을 파고들면서 단일 건으로 이뤄지는 현행 조세 협약만으로는 기업들의 국제적인 조세 회피를 막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여론이 더 우세해졌고, 기업들도 조금씩 태도를 바꿔 대응책을 마련하는 중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올해 6월 발간한 보고서에서 조세 회피의 파급효과(Spill over)가 경제 성장률을 떨어뜨린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현재 조세 회피처에 얼마나 많은 돈이 묻혀 있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다양하다. 미국의 보스턴 컨설팅은 8조 달러(약 8960조원) 정도로, 영국의 세금정의네트워크(Tax Justice Network)는 21조 달러로 추정한다.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는 32조 달러 규모라고도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