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희영 주필

일본 홋카이도 하코다테의 야경(夜景)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 속의 한 컷이다. 케이블 카를 타고 산 위에 올라보면 발밑 시내 야경과 오징어잡이 어선들이 어울려 많은 문학 작품의 배경을 낳을 만하다는 걸 절로 느낀다. 도로엔 한국에는 없는 노면(路面) 전차가 구르고 있다. 시가지는 오렌지 색깔로 조명해 관광객들은 동화 나라에 들어온 듯한 착각에 빠지기 십상이다.

며칠 전 일본경제신문에 사진 한 장이 실렸다. 하코다테 도심 풍경은 이렇게 묘사됐다. '야경을 장식하는 오렌지색 가로등이 인적(人迹)이 듬성듬성한 시가지를 비추고 있다.' 1985년 34만을 헤아리던 하코다테 인구는 27만으로 줄었다. 도심의 인구 감소가 특히 두드러졌다. "전에는 보석 상자 같았지만 지금은 구멍이 뻥 뚫렸다." 황금 보석처럼 반짝이던 번화가의 모습이 기울어지고 있다는 주민의 탄식도 소개됐다.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다음 세상은 인구 감소의 국가, 즉 저(低)인구 사회다. 우리나라는 내년이나 그다음 해부터 생산 인구가 줄어들고 곧이어 총인구가 축소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확언한다. 입으로는 저출산 노령화를 걱정하지만 진짜 인구가 줄어들면 일상생활이 어떻게 변할지 상상하기 힘들다.

하코다테는 진주나 여수를 떠올리게 하는 곳이다. 인구 규모도 비슷하고 맛집·술집 인심이 정겨운 것도 닮았다. 그러나 하코다테는 일본의 경제활동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한 지 20년이 되기도 전에 그런 중규모 도시가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 세대가 죽기 전에 한국판 하코다테의 붕괴를 목격할 수 있다는 말이다.

고도성장 시대 도쿄나 오사카 주변에 많은 신도시, 베드타운, 전원주택단지가 건설됐다. 그것은 경제성장의 자랑스러운 열매였다. 중산층이라는 국가 주축 세력이 자리 잡은 상징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의 신도시 지방자치단체들은 이제 빈집 처리에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나이 든 집주인은 요양병원으로 떠나면서 집을 그대로 버린다. 빈집을 허무는 데 돈이 드는 데다 집을 부수더라도 나대지가 되면 세금이 늘기 때문이다. 그 빈집은 동네 고양이와 쥐의 천국이 되었다가, 화재의 발원지가 되고, 범죄의 거점으로 점점 용도가 다각화된다. 일본 지자체들은 결국 조례를 만들어 세금을 써서 골칫거리 빈집을 치울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한 집 건너 빈집, 두 집 건너 불 꺼진 집들 한가운데서 내가 살고 있다고 상상해 보았는가. 떡볶이 집, PC방, 당구장, 미용실이 모두 문을 닫고 도로 양쪽 상가가 셔터를 내린 채 아무런 조명이 없는 길로 퇴근하는 자신의 모습을 꿈꿔본 적이 있는가. 바쁜 출근길에 층층이 멈추는 엘리베이터에 짜증을 내는 지금 우리 형편에서는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20년 안에 닥쳐올 수밖에 없다.

서울대 행정대학원은 얼마 전 16년 후 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50%를 넘을 시·군·구가 16곳에 달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전체 226개 시·군·구 가운데 27곳은 2030년에 인구가 2만명 이하로 떨어질 것이라고 했다. 이렇게만 되면 그래도 나을 것이다. 일본의 경험에서 확인된 사실은 저인구 현상은 전문가들 예상보다 훨씬 더 빨리, 훨씬 더 심각한 형태로 전개된다는 점이다.

일본도 처음에는 농촌에 노인만 남았다고 탄식하다가 곧 소도읍이 몰락했다. 지금은 대도시 변두리마저 마치 영화 촬영장처럼 옛날식 간판들이 삐뚤빼뚤 걸린 거리로 변하고 있다. 대학의 폐교(廢校)나 거대 입시 학원의 몰락도 지나가는 소나기 같은 단발 뉴스로 끝난다. 독거노인이 이웃 주민의 무관심 속에 몇 달 만에 장례를 치렀다는 애틋한 소식도 사라지고 있다. 이제 나이 들면 이웃의 무관심을 탓하기 전에 생사(生死)를 매일 체크해주다 유품 정리, 장례식까지 치러주는 보험회사와 계약하는 게 현명한 사회가 됐다.

우리 경제는 2010년 6.5% 성장한 것을 제외하면 2008년 이후 줄곧 3%대 이하의 저성장에 빠졌다. 물가는 2년째 2% 이내 상승하는 데 머물고 있다. 저성장, 저물가, 저인구 현상이 한꺼번에 나라를 덮친 것은 1945년 이래 처음이다. 농촌의 저임(低賃) 근로자들이 집단 상경해 제조업 성장을 지탱해주던 성장 스토리도 끝났고, 매년 물가가 오른 덕분에 너도나도 내 집을 소유할 수 있는 꿈도 막을 내렸다.

일본에서는 농촌을 살리자는 말은 더 듣기 힘들다. 지방의 몰락을 막기 위해 대도시에 사람과 돈이 몰리는 것을 억제하자는 논의도 힘을 잃었다. 그 대신 지역마다 중핵(中核)도시 한두 군데에 인구를 집중시키고 투자도 그곳으로 모으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무작정 '지방 보호'만 외쳐서는 저성장·저물가·저인구로 나라가 역회전(逆回轉)하는 것을 감당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절감했다.

우리도 앞으로 많은 것이 거꾸로 회전할 것이다. 3저(低) 흐름을 거스르는 모든 사람, 모든 조직, 모든 도시는 몰락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