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보〉(126~137)=절정 고수들의 기량은 아마추어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깊고 아득하다. 수십수에 이르는 복잡한 수읽기도 경이롭지만, 바늘 끝만 한 틈을 비집고 끝없이 던져오는 살수(殺手)의 예리함은 관전자를 곧잘 전율케 만들곤 한다. 좌하귀 흑이 몰살함으로써 백의 승리는 시간문제라고 보았던 바둑인데 복병(伏兵)은 아직도 도처에 매복해 있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경구(警句)가 바둑판 위만큼 잘 어울리는 곳도 없는 것 같다.

흑이 ▲로 뻗은 장면. 박정환은 미리 읽어두었던 대로 참고도 1로 상중앙 흑 3점을 잡으려다 멈칫한다. 4 이하 12까지 버티는 수순이 보인 것. 20에 이르면 중앙에서 하변에 걸친 백 대마도 미생이어서 수상전이 불가피하다. 하지만 이것은 흑이 유리한 수상전으로 바둑도 역전이란 결론.

6분의 숙고 끝에 상대가 파놓은 무시무시한 함정을 피하고 126으로 보강한 것은 천운이었다. 폭발 직전 기름탱크의 밸브를 가까스로 잠근 데나 비유할까. 126은 우중앙 백 곤마의 삶에도 도움이 된다. 흑은 자체 삶 또는 탈출을 노리고, 백은 흑돌 하나라도 살려 보내지 않겠다는 공방이 134까지 이어진다. 137로 내려 빠진 시점에서 백은 또 한 번 시험에 빠지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