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1월 아사히(朝日)신문 도쿄 본사 2층 창으로 총알 두 발이 날아들었다. 이튿날 '일본 민족독립의용군 별동대'라는 단체 '세키호타이(赤報隊)'가 성명을 냈다. "아사히가 반일(反日) 여론을 키운다"며 기자들을 모두 죽이겠다고 했다. 넉 달 뒤 일이 벌어졌다. 마감 시간 임박한 한신지국에 괴한이 뛰어들어 기자 한 명을 살해하고 한 명에게 큰 상처를 입히고 달아났다. 다시 넉 달 뒤엔 나고야 독신 기자 숙소에 총을 쐈다. "반일 아사히는 50년 전으로 돌아가라"는 성명이 나왔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때 아사히는 다른 신문과 마찬가지로 군국(軍國) 어용 신문이었다. 전시 최고 통수기관 대본영(大本營)이 쓰라는 대로 받아 썼다. 패전 며칠 전까지도 '황국(皇國) 군대가 진격을 거듭하고 있다'고 했다. 논설위원과 기자들은 기사만 쓴 게 아니라 군국주의 핵심들과 한몸이었다.
▶패전 8일 후 1945년 8월 23일 아사히는 사설 '스스로를 단죄하는 이유'를 썼다. 전쟁 부추긴 책임을 고백하는 반성문이었다. 이후 평화·인권·환경·국제주의의 길을 걸었다. 지금은 정치 지도자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가장 강하게 비판한다. 입학식과 졸업식 때 학생들이 일어나 기미가요를 제창하게 하는 데도 반대한다. 위안부 실태도 가장 적극적으로 보도해 왔다. 주요 일간지 중 화이트칼라·고소득층 구독률이 가장 높고 지식인일수록 많이 본다.
▶아사히신문이 지난 8월 초 1980~90년대 위안부 기사 16건을 취소했다. 제주도에서 위안부를 강제 동원했다는 실명(實名) 증언을 토대로 썼던 것이지만 '근거가 없다'고 했다. 아사히를 공격할 기회를 엿보던 우익은 "틀린 옛 기사 때문에 일본의 위신이 추락했다"며 들고 일어났다. 극우 산케이신문 기자였던 사람이 불매운동을 시작했고 어떤 기업인은 광고를 안 내겠다고 했다. 급기야 당시 기사를 썼던 사람들이 교수로 있는 대학에 '그만두게 하지 않으면 폭탄을 터뜨리겠다'는 협박장이 배달됐다. 인터넷에는 '아사히 기자 살해 리스트'라는 것도 돌고 있다.
▶도쿄 특파원 시절 일장기를 그려넣은 검은색 차량이 마이크로 떠들어대며 지나갈 때마다 섬뜩했다. 야쿠자와 연계된 '폭력단 우익'이라고 했다. 일본엔 이들 말고도 종교 우익, 학생 우익, 인터넷 우익까지 우익도 가지가지다. 혐한(嫌韓)·혐중(嫌中) 시위대의 핵심인 이들은 군국주의가 광기를 부리던 1930~40년대를 그리워한다. 이성을 잃은 극단주의자들이 설치는 게 지금 일본의 씁쓸한 단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