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진 논설위원

변호사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고현철 전 대법관이 얼마 전 법원에서 벌금 300만원을 선고받았다. 그는 대법관이던 2004년 사내 비리를 고발했다가 부당 해고됐다는 정모씨가 중앙노동위원회를 상대로 낸 행정소송의 재판장을 맡았다. 패소한 정씨는 다시 회사를 상대로 복직 소송을 냈는데, 몇 년 뒤 로펌에 취직한 고 전 대법관은 정씨 상대방인 회사 측 변호인이 됐다. 두 소송은 내용이 사실상 같아 고 전 대법관이 판사 때 다룬 사건의 수임을 금지한 변호사법을 어겼다는 게 사건 줄거리다.

퇴직 판·검사의 사건 수임 논란은 종종 있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전직 대법관이 형사처벌을 받은 것은 유례없는 일이다. 법조계가 직업윤리를 되돌아보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 사건은 다른 숙제도 던지고 있다. 고 전 대법관은 "정씨 사건 재판장이었다는 사실을 처음엔 전혀 몰랐고, 알기를 기대하기도 어려웠다"고 해명했다고 한다. 몇 년 지난 일이니 기억이 안 날 수는 있다. 그런데 대법관이 자기 재판을 기억하는 걸 기대할 수도 없다니…. 결론부터 말하면 그게 대법원 재판의 현실이다.

정씨가 패소 판결을 받은 2004년 고 전 대법관을 포함한 대법관 12명이 2만 건 넘게 판결했다. 9년 지나 작년엔 두 배 가까운 3만6000건이 됐다. 법원조직법상 대법원은 대법관 전원 합의체와 소부(小部) 합의로 재판하게 돼 있다. 원칙은 전원 합의체지만 대법관 4명씩으로 구성된 3개 소부가 99% 이상 판결한다.

그런데 대법관들의 '합의'란 게 실은 형식적일 때가 많다. 주심(主審)을 맡는 사건만 연간 3000건이나 되는 탓에 순번제로 돌아가는 재판장이나 주심이 아닌 대법관 2명은 사건 기록을 들춰볼 엄두를 못 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법원 재판은 주심 단독 재판"이라는 말이 나온 지 오래됐다. 대법관을 보좌하는 재판 연구관 숫자가 10년 새 두 배로 늘었다. 대법원의 재판 연구관 의존도가 그만큼 높아졌다는 뜻이다. 자기 판결을 몰라보는 대법관이 나와도 이상할 게 없는 것이다.

대법원 사법정책자문위원회가 대법원 사건을 분담할 상고(上告)법원 신설을 제안한 것을 계기로 상고심 개편 논의가 본격화됐다. 곧 공청회도 연다고 한다. 국민이 대법원에 바라는 건 최고의 법률 지식과 권위를 가진 대법관들이 하급심의 잘못을 바로잡아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것이다. 대법원은 그런 국민 개개인의 권리 구제뿐 아니라 법령의 최종 해석 기관으로서 사법부와 사회가 나갈 길을 제시하는 역할도 해야 한다. 그러나 대법원이 두 가지를 동시에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다면 뭔가 해결책을 모색하는 수밖에 없다. 양창수 대법관이 이달 초 퇴임하며 "(대법원 재판에) 더 이상 무리(無理)가 있어선 안 된다"고 지적한 것은 대법원 스스로 '한계에 다다랐다'고 고백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대법원이 상고법원을 설치하겠다면 법관 구성부터 대법관 못지않은 실력과 경험을 가진 사람을 뽑아 그에 걸맞은 권위를 부여하고, 국민을 설득할 방도를 찾아내야 한다. 법조계에는 상고법원 대신 대법관 숫자를 대폭 늘리자는 의견도 있다. 수십 년 묵은 숙제를 단번에 풀어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법조계뿐 아니라 국민 대표들을 참여시켜 논의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