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 고등학교 때 삼원색(三原色)이 뭐라고 배웠죠? 빨강 초록 파랑?"

지난 3일 오전 서울 홍익대학교 미술대의 한 강의실. '기초 평면' 수업에서 이 학교 미대 신형섭 교수가 수강생 13명에게 불쑥 질문했다. 수강생들이 머뭇거리자 신 교수가 말했다. "삼원색은 옐로(노랑), 마젠타(자주), 사이언(청록)이지. 이젠 미대생이니 알아야지."

1학년 전공 필수과목이기도 한 이 수업은 미술 실기시험을 치르지 않고 입학한 이 학교 미대 신입생들을 위해 지난 2011년부터 개편됐다. 과거 실기전형으로 입학한 신입생들과 달리, '비실기전형'으로 입학한 미대 학생들의 수준이 천차만별이라 미술의 기초부터 가르쳐야 할 필요성이 생겼기 때문이다.

비(非)실기 전형으로 입학한 홍익대 미대 1학년 학생들이 지난 3일 강의실에서‘기초평면’수업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 명문 미대의 대표격인 홍익대가 미대 입시 사상 처음으로 입학생 전원을 실기시험을 치르지 않고 '100% 비실기전형'으로 뽑은 지 올해로 만 2년이 됐다. "'손재주'만 있는 학생은 선발하지 않겠다"며 지난 2009년 자율전공 학생 100명을 비실기전형으로 처음 선발한 뒤, 단계적인 확대를 거쳐 2013학년도부터 미대 입학생 520여명 전원을 '비실기전형'으로 선발한 것이다.

서울대·한양대 등에서 일정한 수를 비실기전형(입학사정관제)으로 선발하는 경우는 있지만, 미술 계열 신입생 전원을 비실기전형으로 뽑는 건 홍익대 미대가 국내 처음이자 유일하다. 일각에선 '유야무야되지 않겠느냐' '신입생 실력이 저하되지 않겠느냐'는 회의적 시각도 있었지만, 교수들과 학생들의 만족도는 예상보다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림을 '암기'하는 아이는 뽑지 않겠다" 초강수

홍익대가 이런 파격을 시도한 건 갈수록 과열되는 수험생들의 '테크닉 경쟁' 때문이었다. 과거 미대 입시는 수험생들에게 정해진 시간 내 소묘·정물수채화 등 특정 주제를 그리도록 해 '더 잘 그린 학생'을 합격시키는 방식으로 이뤄졌는데, 이렇게는 더 이상 우열을 가리기도, 미술의 본질을 찾는 일도 어려워졌다는 것이다.

홍경희 홍익대 미대 학장은 "당시 수험생들이 제출한 작품을 보면 어느 학원 출신인지 단박에 알 수 있을 정도로 발상과 기법이 유사해 평가가 무의미했을 정도였다"면서 "'이것이 과연 우리가 추구하는 미술의 정신인가, 더 이상 기교를 잘 쓰는 학생은 뽑지 말자'고 해 도입하게 된 게 비실기전형"이라고 말했다.

대신 홍익대 미대가 본 건 수험생들의 '미술 활동 보고서'였다. 학생들의 일상적인 미술 활동이나 학내외 활동을 평가하기로 한 것이다. 여기선 국내외 미술대회 수상 실적은 일체 제외한다. 이한순 홍익대 예술학과 교수는 "교지 편집부 활동이나 미술관 도슨트 자원봉사 활동, 고등학교 미술교사의 지도평까지도 꼼꼼하게 평가한다"면서 "학교 활동을 충실히 한 아이, 스스로 개성과 창의성을 개발한 아이를 뽑으려고 한다"고 밝혔다.

선발 기준이 '테크닉'에서 '일상활동'으로 옮겨가자 사교육 진정 효과가 생겨났다. 홍익대 입학처가 조사한 결과, 지난해 100% 비실기전형으로 입학한 미대 신입생의 34%가 '사교육을 받지 않았다'고 했다. 2012학년도 실기전형 입학생의 94%가 '사교육을 받았다'고 답한 것과 비교하면 큰 차이다.

◇"실력 차는 사실… 창의성·다양성은 커졌다"

교수진과 학생들 반응도 대체로 긍정적이다. 비실기전형으로 입학한 동양화과 3학년 부효정(21)씨는 "처음엔 걱정했지만, 막상 교수님들이 '어떤 고정관념에도 얽매이지 마라'고 격려해주셔서 기운이 났다"고 했다. 미술학원을 한 번도 다니지 않고 올해 홍익대 미대에 입학했다는 류우연(19)씨는 "실기 실력이 아무래도 선배들보다 뒤처질 것 같아, 부족하다고 느끼는 부분을 학교에서 마련한 프로그램을 통해 보충했다"고 말했다.

신형섭 교수는 "한 강좌에서 보통 10% 안팎의 학생이 '기초'가 부족한 상태이지만, '스케치를 해오라'고 했을 때 연필 대신 엉뚱하게 사인펜이나 볼펜을 쓰는 학생들을 보면 대체로 비실기전형 학생들이고, 이런 시도들이 인상적인 결과를 낳을 때가 많다"고 했다.

홍익대 측은 2011년부터 비실기전형 입학생들의 실기 능력을 높이는 쪽으로 교과과정을 재편했다. 또 미대 신입생 전원을 실기시험을 치르지 않고 선발한 2013학년도부터는 '신입생 예비학교-드로잉100'을 개설해 실기 기초를 가르쳤다.

홍익대 미대의 실험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비실기전형 확대로 "천편일률적이던 입학생들이 다양해지고 있다"는 평가도 많지만, "아직 성패를 말하긴 이르다"는 유보적인 입장도 있다. 홍경희 학장은 "앞으로 비실기전형 합격생들의 졸업 후 진로를 체계적으로 추적해 입시 변화의 성패를 가늠할 예정"이라며 "미대를 나와도 사업가가 되고 소설가가 되는 시대에, 이런 미대 입시의 변화가 '미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근본적 질문을 던지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