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태진 수석논설위원

'원코리아 뉴라시아 자전거 평화 원정대'는 지난주 러시아 볼로소보에 들어서자마자 구경거리가 됐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서쪽 소읍(小邑) 사람들 눈길을 끌어당겼다. 자전거 스무 대와 낯선 차 여섯 대가 줄지어 들이닥쳤으니 그럴 만도 했다. 아시아 사람 마흔 명이 한꺼번에 온 것도 아마 처음이었을 것이다.

오토바이 탄 청년들이 호텔까지 따라와 차 안을 기웃거렸다. 그 눈초리에 대원들이 긴장했다. 차 와이퍼와 안테나를 뽑아 간수하자는 얘기가 나왔다. 한나절 85㎞를 두 바퀴로 달려온 원정대가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자 동네 조무래기들이 에워쌌다. 중년 사내 몇은 머플러 뗀 차를 요란하게 타고 왔다. 노인과 아낙들은 멀리서 지켜봤다.

대원들은 러시아 사람이 거칠고 무뚝뚝할 거라고 생각했다. 이방인(異邦人)을 보는 시선도 곱지 않으려니 했다. 그건 지레짐작이었다. 손짓 섞어 아이들과 말문을 트자 마음도 열렸다. 예닐곱 살 여자아이들이 싸이의 말춤을 췄다. 서너 살 사내아이는 두 보조 바퀴 뗀 자전거로 묘기를 뽐냈다. 자전거 고수(高手)들 앞에서 갑자기 멈춰 앞바퀴를 추켜올렸다. 박수와 환호가 터지자 아이는 신바람을 내며 호텔 앞을 누볐다.

아이들은 대원들과 어울려 사진을 찍었다. 소녀들은 수줍어하면서도 렌즈를 쳐다봤다. 소년 한 무리가 축구공을 몰고 왔다. 젊은 대원들이 공을 가로채 거리 축구가 벌어졌다. 긴 늦여름 날 땅거미 지도록 떠들썩하게 축구판이 이어졌다. 대원들은 차 와이퍼도 안테나도 떼어내지 않았다.

호텔은 이름일 뿐 게스트하우스에 가까웠다. 한 방에 서넛씩 침대를 들였는데도 객실이 모자라 바닥에 침낭을 폈다. 공동 화장실은 깨끗하지 못했다. 물에선 녹 냄새가 심하게 났다. 마을에서 꽤 괜찮다는 호텔이 그랬다. 원정대가 자전거 타기 좋게 한적한 길을 찾아 시골로 다녔기 때문이다. 점심 먹을 음식점도 만나기 어려웠다. 걸핏하면 '노상(路上) 취사장'을 차렸다. 버너로 물 끓여 컵라면에 햇반 말아 먹었다. 봉지에 담긴 '전투 식량'을 뜨거운 물로 불려 점심을 때웠다.

발트 3국 지날 땐 날씨도 험악했다. 하루도 비를 거르지 않았다. 잿빛 구름 짙고 날은 쌀쌀했다. 리투아니아에선 내내 비 오고 맞바람 불었다. 트럭들이 지나가며 일으키는 바람에 자전거가 휘청거렸다. 차들은 물보라까지 끼얹었다. 대원들은 한 치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자전거로 신천지를 내달리는 즐거움 앞에선 궂은 날씨, 불편한 점심도 대수롭지 않았다.

지난 3일 에스토니아에서 러시아로 넘어오자 기온이 22도까지 올라갔다. 발트 3국보다 5~6도 높다. 하늘은 파랗고 햇볕은 따갑고 공기는 보송보송했다. 전날만 해도 상트페테르부르크 기온이 3도까지 떨어지고 우박이 퍼부었다는데…. 축복하듯 그날부터 '바브이 레타'가 시작했다. 가을이 깊어갈 무렵 다시 오는 늦더위 '인디언 서머'다. 열흘쯤 가장 찬란한 날이 이어진다고 했다. 경찰차 콘보이를 받으며 시골길로 접어들자 그 말이 맞았다.

길은 부드럽게 휘며 들판을 나아갔다. 길가엔 키 큰 분홍 꽃이 지면서 하얀 홀씨를 날렸다. 갓털이 눈부시게 빛나며 떠다니는 게 봄날 같다. 우리 분홍바늘꽃 비슷한 '이반-차이'다. '리비나'는 난대림 나무처럼 빨갛고 자잘한 열매를 잔뜩 매달았다. 진홍 여름 꽃이라도 핀 듯하다. 흰 바탕에 코발트빛 칠한 러시아 정교회들이 여름 풍경을 거든다. 노랗게 물들기 시작한 자작나무는 가을이다.

이튿날 볼로소보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 갈 때도 낮 기온이 20도였다. 발트 해안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엔 첫눈이 왔다는 날이다. 도중에 자전거 대원들만 23㎞ 길을 달렸다. 너비 2~3m밖에 안 돼 차가 따라갈 수 없다. '운하의 도시' 상트페테르부르크로 흘러가는 수로(水路) 곁으로 난 길이다.

여느 때보다 곱절 걸려 두 시간 뒤 합류한 대원들은 흙탕물투성이다. 곳곳에 고인 물을 지나다 보니 무릎까지 빠지는 웅덩이도 있었다고 한다. 자전거째 넘어져 흙탕물을 뒤집어쓰고도 상기된 얼굴로 "행복하다"고 했다. 서른 살 황인범 대원이 말했다. "자작나무 숲 길에 뱀들이 기어다녔다. 자동차에 신경 안 쓰고 맑은 공기 마시며 모두 한 호흡으로 달렸다. 속도는 느리고 힘은 들어도 마음의 속도는 빨랐다. 심신이 위로받았다."

러시아에서 계절다운 계절은 5월 봄부터 9월 가을까지 다섯 달이다. 일곱 달은 햇빛 없이 음산하고 눈보라 몰아친다. 7일 볼가 강변 스타리차로 가는 길가 예쁜 마을에 잠깐 섰다. 목조 집들은 작고 소박해도 경쟁하듯 색색 꽃을 가꿔놓았다. 짧아서 더 소중한 '햇빛의 계절'을 누리는 방법이다. 꽃을 그렇게 이웃과, 지나는 차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나와 원정대에게 손을 흔들어줬다. 며느리·손녀와 집 앞에 선 할머니에게 원정 루트 그린 기념 손수건을 건넸다. 할머니가 집 안에서 병을 들고 와 대원 손에 쥐여줬다. 야생 딸기로 담근 잼이다. 할머니는 떠나는 원정대를 향해 검지·중지 모아 허공에 거듭 십자가를 그렸다. 모난 데 하나 없는 표정으로 가는 길 무사하기를 빌었다. 러시아 시골은 온화했고 사람들은 순박했다.

10일 모스크바까지 한 달 넘게 원정대와 함께 다녔다. 그러면서 부러웠다. 대원들은 느리게 두 바퀴로 가며 행복해했다. 길에서 마주치는 자연과 풍광과 사람에 고마워했다. 그들 힘찬 기운 나눠 받아 덩달아 젊어지고 행복했다. 이런 길을 언제 다시 갈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