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에서 내려다보이는 원형 무대는 맑은 호수다. 이 호숫가에 펜션을 갖고 있던 퇴역 장군이 세상을 떠나면서 인근 펜션 주인들에게 유언을 남긴다. 갓 스무 살 외동딸 복희가 행복할 수 있게 보살펴 달라는 것이다.

하지만 복희의 아버지 자리를 대신하게 된 펜션 주인들은 한몫 잡으려는 속셈으로 장군의 무덤을 그곳에 만들어 많은 조문객이 몰려들게 한다. 여기서 이들은 복희에게 '슬픈 복희'가 되도록 강요한다. 시간이 지난 뒤에도 계속 아버지 무덤을 찾으며 비장함에 빠지는 역할을 맡도록 한 것이다.

연극‘즐거운 복희’의 배우들. 복희 역의 전수지(가운데)와 이호성·강일·박혁민·유병훈·박완규·이인철(왼쪽부터).

여기까지 듣는다면, 대부분의 한국인은 30초 안에 누군가가 머릿속에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연극 '즐거운 복희'(이강백 작, 이성열 연출)는 1980년대식 단선적 정치비판극이 아니다. 유언과 함께 "이곳을 세상에서 가장 안락한 곳으로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는 장군도, 끝까지 순수함을 잃지 않고 '즐거운 복희'가 되고 싶어 하는 복희도, 부정적인 인물은 아니다. 연극은 복잡하고 중층적인 은유와 상징으로 가득 차 있다.

펜션 주인들은 '아버지의 죽음을 애도하는 복희'라는 이야기를 만들더니, 복희와 함께 도망가려던 나팔수가 호수에 빠져 죽자 '물속에서도 나팔 소리가 들린다'는 새 이야기를 만든다. 나중에는 가짜 무덤까지 만들어낸다. 온갖 이야기와 역할극 속에서 정작 자아(自我)의 정체성은 행방불명되는 상황인 것이다.

'즐거운 복희'는 본질적으로 스토리텔링, 즉 이야기의 예술일 수밖에 없는 연극 장르 자체에 대한 전복(顚覆)처럼 보이기도 한다. 연극은 "인간은 이야기를 만들고, 이야기는 인간을 만든다"고 말한다. 교과서에 작품이 실릴 정도로 국내 대표적인 극작가 중 한 사람인 이강백은 이 작품을 '제2의 데뷔작'으로 여길 만큼 공을 들였다고 한다. 지난 5월 이례적으로 훈훈한 2인극 '챙!'을 무대에 올렸던 그는 "다음 작품은 다시 까칠해질 것"이라고 말했었다.

지난해 이해랑연극상을 받은 연출가 이성열은 '죽음의 집 2'와 '과부들'에서 보였던 우화적이고 제의적(祭儀的)인 연출로 극의 분위기를 독특하게 살려냈다.


▷21일까지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공연시간 115분, (02)758-2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