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 총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너무 많이 하는 것보다 더 위험하다.”

직설적인 화법을 즐겨 쓰는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지난달 잭슨홀 연설에서 두 달여 만에 태도를 바꿔 추가 부양에 나설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으면서, 투자자들이 다시 한번 ECB의 통화정책에 주목하고 있다.

긴축을 요구하는 독일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 시장 참가자들 사이에서는 ECB가 자산담보부채권(ABS)을 사들이는 이른바 ‘프라이빗 QE’를 도입할 것이라는 구체적인 방안까지 유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ECB 고위 관계자들도 이달 중순부터 ‘추가 부양’의 신호를 시장에 흘리면서 유럽 국채 금리를 사상 최저 수준으로 끌어내리고 있다.

올해 6월 전인미답의 마이너스 예치금리를 도입했을 당시만 해도, ECB는 연내 추가 부양을 자제하겠다는 뜻을 우회적으로 밝혔다. 하지만 유럽의 2분기 경제 성장률이 워낙 부진했던 데다 8월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5년 만에 최저치로 떨어지는 등 유럽 경제가 디플레이션(저물가 속 경기침체)의 문턱까지 다가오며 변화의 기류가 일기 시작했다.

ECB의 추가 부양을 요구하는 전문가들은 입을 모아 “유럽 경제가 일본처럼 잃어버린 10년에 직면할 수 있다”고 경고한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제프 스티글리츠 콜롬비아 대학교 교수 등 저명 학자들도 최근 당국이 서둘러 행동에 나서지 않으면 유럽 경제가 디플레이션에 빠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유럽 경제와 일본 경제는 정말로 닮은꼴일까? 1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잃어버린 10년’의 중턱쯤이었던 1999년 2월, 일본은행은 단기 금리를 0%에 가깝게 유도하는 이른바 ‘제로금리’ 정책을 실시했고, 2001년 3월에는 국채 매입에 나서며 당시로써는 전통적인 범위를 넘어서는 통화정책을 펼쳤다. 돈을 거의 공짜나 다름없이 빌려주는 형국이었지만 이런 노력에도 불구, 은행들의 전체 대출금은 2000년 460조엔에서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인 2006년 400조엔까지 감소했다.

지금의 ECB도 당시 일본은행과 비슷한 고민에 빠진 상태다. 은행들의 대출을 독려하려 올여름 사상 처음으로 ‘마이너스 금리’도 도입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5년이 지난 시점에서 ‘제로금리’를 도입한 ECB 입장에서 10~20년 전 일본 경제는 반면교사로 삼기에는 충분한 사례다. 전문가들은 부동산 버블 붕괴의 여파로 기업들이 빚을 갚는 데 여념이 없던 1990년대 일본 경제도 지금의 유럽의 경제도 이른바 ‘대차대조표 경기침체’(balance sheet recession·기업의 부채 상환과 투자 감소로 인한 경기 침체)를 겪고 있다고 진단한다.

하지만 과거 일본 경제와 지금의 유럽 경제를 수평 비교하는 것은 무리라는 반론도 나온다. 유럽 경제는 일본만큼 심각한 부동산 버블 붕괴를 겪지 않은 데다 국가 부채 수준도 일본 만큼 높은 수준은 아니라는 이유에서다.

모든 투자자가 ECB의 추가 부양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2일 자에서 “ECB의 추가 부양은 정부 실패의 또 다른 표본”이라며 “재정 정책과 발을 맞추지 못하는 통화정책은 효과가 미미할 수밖에 없다”고 짚었다.

이달 6월 발표된 장기대출프로그램(TLTRO)이 시행되기도 전에 ECB가 추가로 대책을 내놓기에는 쉽지 않다는 의견도 나온다. 이 밖에 ECB가 이 추가 부양에 나서기 전에 자본비율 규제 완화 ▲대출심사 시 국가별, 은행별로 다른 기준으로 자산 퀄리티 및 등급 측정 인정 ▲디플레가 심화될 경우 은행들의 대출 축소 및 마진확보를 위한 높은 이자 지급 문제 등이 해결돼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