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격스럽고 은혜로운 날입니다. 우리가 안중근 토마스 의사(義士)를 추모하는 것은 그분의 삶이 숭고했으며 신앙과 애국 애족의 정신이 큰 귀감(龜鑑)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안 의사 유묵(遺墨) '敬天(경천)'을 보면서 우리도 안 의사처럼 평화의 도구로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됩니다."
4일 오전 서울 명동대성당 내 교구청. 안중근 의사의 유묵 '경천'을 서울 잠원동성당(염수의 주임신부)으로부터 기증받는 자리에서 염수정 추기경은 이렇게 말했다. 안 의사가 1910년 3월 순국(殉國)을 앞두고 중국 뤼순(旅順) 감옥에서 천주교 정신을 담아 쓴 '경천'이 1세기 만에 천주교의 품으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본지 7월 17일자 A2·21면 보도〉
'경천'이 천주교의 품에 안긴 것은 우리 문화예술계 인사들이 한마음으로 뜻을 모았기에 가능한 일이어서 더욱 눈길을 끈다. 일본에 있던 이 작품을 국내로 들여온 이는 삼중 스님(서울 보덕사 주지). 삼중 스님은 1980년대부터 일본을 오가며 임진왜란 당시 왜군이 잘라간 조선인의 귀를 모아 만든 무덤(耳塚)의 원혼을 고국으로 모셔오는 등 일본 내 우리 문화재 환수에도 앞장서온 인물. 스님은 그러나 "여의치 않은 사정으로" 지난 3월 서울옥션 경매에 '경천'을 7억원에 내놓았다. 삼중 스님은 수년 전부터 매주 월·수·금요일 혈액투석을 해야 할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 상태다. 3월 경매는 응찰자가 없어 유찰됐다. 이후 삼중 스님과 김종규 한국박물관협회 명예회장, 한국 천주교회사 권위자인 조광 고려대 명예교수, 예술의전당 서예관 이동국 부장 등은 "안 의사가 천주교 신자로서 신념을 담은 글씨인 만큼 이 작품은 천주교의 품이 제자리"라고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워낙 고가(高價)라 천주교계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이러는 사이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경천' 매입에 관심을 보였다. 거의 대한민국역사박물관으로 소유권이 넘어가려던 찰나 서울 잠원동성당 김종박 사목회장에게서 연락이 왔다. "저희가 매입하겠습니다." 1947년 설립돼 '강남 1호 본당'이란 자부심이 강한 잠원동성당은 3년 전부터 시내 6개 성당과 연합해 '교회사학교'를 운영하고 있다. 염 주임신부와 사목회는 교회사학교 강의로 인연을 맺은 조광 교수로부터 '경천'의 사연을 듣고 우선 건물보수·불우이웃돕기 등을 위해 적립해둔 예비비 5억9000만원을 지출하기로 한 것. 사정을 들은 삼중 스님도 '경천'의 천주교행(行)을 선뜻 찬성하고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이 양보함으로써 '경천'은 104년 만에 천주교 품에 안기게 됐다. 한편 잠원동성당 사목회는 고마운 마음으로 삼중 스님이 천주교가 운영하는 서울성모병원에서 투석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방안을 추진할 계획이다. 100년 전 안 의사의 글씨 1점이 종교 간 화합까지 이끌어내고 있는 셈이다.
'경천'을 기증받은 서울대교구는 오는 8일부터 10월 31일까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열리는 천주교 유물 전시회 '서소문·동소문 별곡'전에 공개한 뒤 2017년 완공 예정인 서소문 순교성지 내 교회사박물관에 전시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