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투갈 리스본 시내를 다니는 노란 트램(tram·노면전차). 소설가 백영옥은 여행을 떠나고 싶던 어느날,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본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우연히 기차표를 발견해 리스본으로 떠난다.

여행을 떠나고 싶던 어느 날 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봤다. 제러미 아이언스가 고전문헌학 교사로 나오는 이야기였다. 영화는 비가 쏟아지던 출근길 그가 스위스 베른의 다리 위에서 자살하려던 한 여자를 구하면서 시작된다. 갈 곳 없이 지친 여자를 학교로 데리고 온 남자는 자신의 수업 중 떠나 버린 여자를 쫓다가 그녀가 놔두고 간 빨간색 코트에서 오래된 책 한 권과 리스본행 열차표를 발견한다.

여자에게 책과 기차표를 건네주기 위해 기차역까지 찾아가지만 결국 여자를 만나지 못한 남자는 이해할 수 없는 충동에 사로잡혀, 여자가 타려 했던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대신 몸을 싣는다. 그리고 기차 안에서 '여행을 떠나고 나서야 나 자신을 찾아가는 여정도 시작된다' 같은 문장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의문의 책의 저자인 아마데우에게 빠져든다.

남자의 이름은 그레고리우스. 그는 의사이자 작가였던 아마데우의 흔적을 쫓는다. 아마데우는 살라자르 독재 정권 치하의 하수인이었던 멘지스의 목숨을 구한 일로 의사라는 직업윤리를 지키는 대신 사람들의 지탄을 받게 된다. 우여곡절 끝에 반정부 저항 단체에서 활동하게 된 그는 가장 친한 친구인 조지의 연인을 사랑하게 되고, 그녀를 죽이려는 친구를 피해 도피 행각을 벌인다.

그레고리우스가 이 책의 저자인 아마데우의 과거 흔적을 쫓는 일은 이 영화의 '시점'이 된다. 그렇게 그는 책 속으로 빠져 들어가 평생 판사로 살며 정권에 복무했던 아마데우의 아버지, 독신으로 살며 오빠만을 지켰던 그의 여동생 아드리아나, 혁명가였으나 질투의 화신으로 돌변한 친구 조지와 아마데우의 연인이었던 스테파니아의 삶을 만난다.

"내가 원해서 탄 기차가 아니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아직 목적지조차 모른다. 먼 옛날 언젠가 이 기차 칸에서 잠이 깼고, 바퀴 소리를 들었다. … 내 칸에 가끔 손님이 오기도 한다. 문이 닫히고 잠겨 있는데 이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방문객은 있다. 거의 언제나 나에게 맞지 않는 시간에 손님이 온다. 대부분 현재라는 시간의 손님들이지만 과거에서 온 손님도 많다. 이들은 자기 형편에 따라 마음대로 오가며 나를 방해한다. 모든 것은 일시적이고 구속력이 없으며, 잊힐 운명이다. … 여행은 길다. 이 여행이 끝나지 않기를 바랄 때도 있다. 아주 드물게 존재하는, 소중한 날들이다. 다른 날에는 기차가 영원히 멈추어 설 마지막 터널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낀다."

영화에는 없지만 원작 소설에는 묘사된 강렬한 장면이 하나 있다. 주인공 그레고리우스와 처음 만난 여자는 갑자기 외투에서 사인펜을 꺼내 그의 이마에 숫자를 적는다. "죄송해요. 이 전화번호를 잊어버리면 안 되는데, 종이가 없어요. 전…, 저는 이 번호를 기억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잊어버리려고 했는데, 날아가는 편지를 본 순간… 적어두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이 장면을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었다. 그리고 만약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어떻게 행동했을까를 생각했다. 만약 내가 그레고리우스처럼 어제와 오늘과 내일이 다르지 않을 반복되는 일상을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군가 내 이마에 적은 뜻밖의 낯선 번호를 외면하긴 힘들었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 안에 있는 것 가운데 아주 작은 부분만을 경험할 수 있다면 나머지는 어떻게 되는 건가? '리스본행 야간열차'는 이 질문에 대한 길고 내밀한 대답이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가 우연히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나는 한 남자의 얘기로 시작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반복되는 일상을 벗어나지 않고서 우리는 내 안의 다른 나와 만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행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단순한 공간이동을 말하는 건 아닐 거다.

"내 말을 믿어라! 존재의 가장 큰 수확과 가장 큰 즐거움을 거둘 수 있는 비결이다. 위험하게 살아라! 베수비오산의 산기슭에 그대들의 도시를 건설하라!"

니체의 '즐거운 학문'을 읽은 것이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무슨 뜻인지 정확히 모르고도 그의 책들을 읽기 시작했다. 내 삶과는 정확히 '반대' 지점을 이야기했기 때문에 생긴 투명한 매혹 때문이었다. 나는 문득 '너 자신을 만나라! 떠나라!'라는 여행사의 카피 문구를 떠올리며 불안과 고독을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의 세대는 위험은 감수하는 게 아니라 피하고 배제하는 것이라 배워왔다는 점을 새삼스레 상기했다.

하지만 '보험' 회사가 '불행'에 대처하는 인간 특유의 능력을 퇴화시키는 것처럼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세계는 고독을 견디는 인간 특유의 능력을 점점 앗아가고 있다. 그것은 내게 점점 더 확신처럼 다가왔는데, 디지털 세계에서 '과잉 소통'으로 점점 더 희귀해져 가는 감정의 형태가 고독일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일상의 고독은 점점 사라지고, 여행 산업의 팽창과 함께 잘 관리된 형태의 고독이 유별나게 살아남는다. 지금의 사람들은 이제 고독의 공간을 '쇼핑'하는 세대로 모로코 사막 트레킹에서 느끼는 고독, 안나푸르나나 산티아고에서 느끼는 고독 등을 찾아 떠나는 사람들인 것이다. 즉 '돈이 많이 드는 멜랑콜리한 자본주의적 고독'이다.

그레고리우스가 여행을 떠난 리스본은 이국적이며 아름답다. 바다가 보이고, 트램이 다니고, 유럽의 옛 골목은 그림엽서 같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리스본행 야간열차' 같은 영화를 보며 마음이 울렁인다면 그것은 오래전 '예약'되거나 '계획'되지 않은 여행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연과 충동에 의한 삶을 향한 여행 말이다. 누구에게나 이런 순간은 찾아온다. 다만 그것을 '상상'이 아니라 '실행'할 수 있는 것은 용기의 문제일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사람들이 무수히 던지는 질문에 대한 답일 수도 있겠다. 현실을 선택할 것인가, 이상을 선택할 것인가! 결국 이 또한 용기 문제다. 내가 서 있던 자리에서, 멈추고 나를 만나기 위해 떠날 수 있는 것이야말로 정말 그렇다.

리스본행 야간열차 ― 파스칼 메르시어 원작의 소설로 빌레 아우구스트 감독이 영화로 만들었다. 제러미 아이언스, 멜라니 로랑 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