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평중 한신대 교수·정치철학

우리나라는 정의(正義·justice)의 레토릭이 넘쳐나는 사회다. 그만큼 한국인들이 정의에 목마르다는 얘기일 터이다. 불의(不義)를 참지 못하는 시민적 감수성이 팽팽한 곳이야말로 살아있는 사회다. 그러나 '바를 정(正), 옳을 의(義)'의 합성어인 정의가 언제나 바르고 옳게 나타나는 것만은 아니다. 정의의 이념을 현실로 옮기는 각자의 생각이 다른 데다 권력 의지나 이해관계를 정의의 수사(修辭)로 포장하는 우리의 오래된 습관 때문이다.

온 나라를 시끄럽게 한 유병언조차도 억울하다고 되뇌면서 죽어갔다. 유병언과 그 추종자들은 자신(自身)들이 불의(不義)한 국가 권력과 언론의 희생양이 되었다고 믿는다. 그렇다면 우리는 스스로 정의로움을 확신하는 유병언 계열 구원파 신도들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 이석기 일당도 마찬가지다. 이석기 일파는 통진당 RO그룹의 혁명 노선이 역사의 정의를 구현하고 있다고 단언한다. 정의의 일꾼인 자신들을 탄압하는 대한민국의 공권력은 불의의 세력이라는 논법이다. 우리는 이석기 일당의 이런 정의관(正義觀)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신앙인 가운데서 유병언 일파는 극소수이고, 사회운동가 중에서 이석기 일당은 한 줌에 불과하므로 그들의 주장은 정의를 참칭(僭稱)하는 사견(邪見)일 뿐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 이는 곧 다수의 의견이 정의를 담보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수의 생각이 그르거나 불의한 것으로 판명되는 역사적 사례를 너무나 많이 보아왔다. 정의는 분명 다수와 소수의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다. 최소한 유병언 일파와 이석기 일당은 그렇게 믿고 있음이 분명하다.

유병언과 이석기는 물론 극단적 사례다. 하지만 정의와 관련된 가장 중요한 교훈을 섬광처럼 드러낸다. 어느 누구도, 또 어떤 집단도 양심이나 사상을 내세워 정의를 독점할 수 없다는 통찰이다. 정의는 주관적 확신을 훌쩍 뛰어넘는 공적 차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나 세력이 스스로 정의롭다고 주장한다면 그 주장의 객관적 사실성과 규범적 정당성이 공론 영역에서 철저히 검증되어야만 한다.

자기 성찰을 거부하는 정의는 주관적 망상이거나 선전선동일 가능성이 크다. 최악에는 검증되지 않은 정의는 정의라는 이름의 테러를 동반하기도 한다. 정의의 여신 디케가 세상을 베어버릴 칼을 들고 있고, 의(義)의 파자(破字)가 희생양을 바친다는 뜻임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정의로 가는 길은 불의로 전락하는 길과 섞여 있으며 역사의 피바람은 정의의 레토릭과 동행하기 일쑤였다. 그만큼 정의는 무섭고 어려운 것이다. 검증과 성찰 앞에 열려 있는 정의가 겸허한 모습을 취할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정의를 자임(自任)한 유병언과 이석기의 주장은 사실에 입각하지 않았으며 정당하지도 못한 데다 오만하기까지 해서 정의를 훼손한다. 결국 그들은 정의를 참칭하고 모욕했을 뿐이다.

지난 대선 때의 국정원 댓글 사건에서 '경찰 수뇌부의 수사 축소 압력'을 폭로한 서울 수서경찰서 전(前) 수사과장 권은희씨는 어떤가? 자신을 '이 시대의 양심이자 정의'로 부르며 광주에 전략 공천한 제1 야당의 제의를 그녀는 "우리 사회에 정의의 숨결이 더 멀리 퍼지도록 하겠다"며 수락했다. 그러나 그녀의 폭로 내용 핵심은 1·2심 재판부에서 '허위이거나 사실적 오류'로 판단되었다.

정의의 사도(使徒)를 자처한 권은희씨가 정의의 제1 준거인 사실성을 정면에서 위반한 것이다. 비사실적인 주장은 대선 부정을 고발한 도덕적 정당성도 허문다. 그런데도 그녀는 '불의에 맞선 정의'로 스스로를 높여 표상한다. 결국 권은희씨는 정의의 이름을 함부로 일컬음으로써 정의를 참칭하고 정의를 희롱하고 있는 셈이다. 권은희씨가 '정의로운 광주에 안성맞춤인 후보'이기는커녕 광주 정신을 모독하는 후보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정의로운 사회를 향한 출발점은 정의의 무서움 앞에 한없이 겸손해지는 것이다. 우리의 정의감은 대한민국의 성취를 가능케 한 소중한 자산이다. 하지만 정의감을 남용하거나 오용할 수 있는 위험성을 항상 직시(直視)해야 한다. 이런 자기 성찰이 결여될 때 불의한 전두환 정권이 '정의 사회 구현'을 표방한 것 같은 희비극이 다시 생기지 말라는 보장이 없다. 완벽한 정의 실현을 꿈꾼 마르크스의 이상이 현실사회주의의 숨 막히는 불의로 나타난 것도 마찬가지 교훈이다. 정의의 첫걸음은 정의를 참칭하는 자들을 추방하는 데서 시작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