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혜 사회정책부 기자

1996년 겨울 한국정신대연구소의 젊은 연구자가 일흔 살 된 위안부 할머니를 찾아갔다. 할머니는 보증금 1000만원에 30만원짜리 사글세 집에 살고 있었다. 긴 대화가 시작됐다. 묻는 사람도, 대답하는 사람도 목이 멨다. 할머니의 이름은 김○란.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언니와 나란히 필리핀 외딴 마을로 끌려갔다.

거기서 겪은 일은 참혹했다. 살아 돌아온 뒤 할머니는 여러 번 정신과에 갔다. 의사가 "지나온 이야기를 죽 하라"고 했다. 할머니는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약만 받아서 왔다. 기억이 도지면 불쑥 뛰쳐나가 산에 올랐다. 한겨울에도 집 안 문을 열어젖혔다.

아베 총리가 이런 증언을 알까. 김 할머니는 위안부 피해자 중에선 그래도 후반생이 행복했다. 한 남자가 과거를 모두 알고도 청혼했다. 40년간 곁을 지키며 흔들리는 아내를 다독거렸다. 연구자가 위안소 생활의 세부(細部)를 묻자 남편은 "깊은 얘기는 내가 피해줄 테니 말하라"며 잠시 자리를 떴다. 이런 증언이 정신대연구소가 모은 것만 여섯 권이다. 어떤 소녀는 초경을 하기 전에 매독부터 앓았다.

양심적인 일본인들이 확보한 증거도 많다. 일본인 위안부 게이코는 중일전쟁 발발 직후 조선인 소녀들과 중국 전선에 투입되던 날을 생생하게 기억했다. 일본 군함 맨 밑층에서 군마(軍馬) 수십 마리가 짚을 씹고 오줌을 눴다. 그 옆에 웅크린 조선인 소녀가 울 것 같은 소리로 속삭였다. "우리, 군인들 식사하고 빨래만 해주면 되는 거지요?"

일본군은 게이코 일행을 '군용 화물'로 분류해 군함에 '적재'했다. 조선인 소녀 중 하나가 임신을 하자 군의관과 부대장이 다퉜다. 군의관이 "낙태시키자"고 했다. 부대장이 "낙태는 일본 형법상 불법"이라며 "공중변소 하나 망가져도 일본은 망하지 않는다"고 했다.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가 지난해 발견한 일본군 위안소 관리인의 일기를 보면 '4차 위안단'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일본군이 위안부 동원부터 위안소 운영까지 전 과정을 조직적으로 수행했단 증거다. 일본 정부가 주장하는 것처럼 군이 단순히 '관여'한 정도가 아닌 것이다. 위안소 관리인은 수시로 군에 '실적'을 보고했다. 여행할 땐 군용 교통수단을 타고 군부대에서 잤다. 군이 그를 지휘하고 보호했다.

정부는 위안부 할머니에게 월 101만2000원씩 생활비를 드린다. 간간이 관련 행사를 지원하고, 주한 일본대사를 불러 싫은 소리를 한다. 그 정도 하면서 "노력했다"고 할 수 없다. 김희정 여성가족부 장관이 청문회 때 "위안부 사료를 국가기록물로 등재하고 백서를 내겠다"고 했다. 그런 기본 조치를 왜 이제 하는지 안타깝다. 헌법재판소는 3년 전 "정부가 이 문제를 방치한 건 위헌"이라고 결정했다. 증거 발굴도 민간이 다 했다.

위안부 문제는 과거사가 아니다. 앞으로도 계속 불거질 한·일 관계의 핵심 이슈다. 롯데호텔이 자위대 행사에 장소를 빌려줬다가 하루 전에 취소했다. 자위대보다 우리 네티즌이 더 겁났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