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4일부터 열린 스미스소니언 포크 페스티벌의 무대인 워싱턴몰의 중국 문화관.

“규모, 장소, 시간의 문제일 뿐 중·일(中日) 간 전쟁 가능성은 99.9%이다. 누가 승자일지는 알 수 없지만, 이기고도 질 수 있다는 점에서 0.1%의 전쟁 불발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무력으로 섬 하나를 탈환할 수는 있겠지만, 이후 닥칠 국제사회에서의 후폭풍을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다.”

최근 워싱턴 싱크탱크에서 만난 일본의 군사 전문가로부터 들은 얘기이다. 중·일이 실제 전쟁을 벌일 경우 일본이 질 것이란 가정이 깔린 말처럼 들린다. 만약 일본이 전쟁에 지게 되면 그 이후의 사태를 맞이할 준비 태세, 즉 ‘플랜B’가 무엇인지 물어봤다. “하드파워가 아니라 소프트파워로 승부를 걸 수밖에 없다. 21세기는 소프트파워로 싸우는 시대이다.”

핵폭탄이나 대륙간 탄도탄 같은 ‘무시무시’한 얘기를 기대했지만 의외의 반응이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워싱턴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일본 소프트파워 전시관이 머리에 떠오른다. 워싱턴은 무료 전시관과 문화 이벤트가 넘치는 곳이다. 스미스소니언박물관에서부터 미국 국립예술관(National Gallery of Arts), 케네디센터에 이르기까지 워싱턴 곳곳에는 대규모 전시관, 음악관, 극장이 들어서 있다.

연방정부의 자금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대부분 무료다. 흥미로운 것은 안의 내용물이다. 기본적으로 미국 문화와 역사를 보여주는 공간이지만, 도쿄에서 날아온 문화·예술작품들이 항상 어딘가에 들어서 있다. 미국 국민을 상대로 한 소프트파워의 현장이다.

아시아 문화에 관한 워싱턴 내 최대 전시 공간은 스미스소니언의 프리어미술관(Freer Gallery)이다. 워싱턴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대형 광장인 워싱턴몰 남쪽에 위치해 있다. 밖에서 보면 2층 건물처럼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가면 지하 4층까지 내려가는 신비한 건물이다.

아시아 예술품 수집가이던 찰스 프리어가 기증한 2만7000여점의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중국, 일본을 중심으로 한국, 베트남, 인도, 심지어 중동의 작품도 볼 수 있다. 프리어미술관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아시아 예술품은 중국 것들이다.

양적으로 엄청나다. 수묵화를 비롯해 당(唐), 송(宋), 원(元), 명(明), 청(淸)에 이르는 상설 전시관만도 10개 이상이다. 수묵화, 조각품, 도자기 등이 주류이다. 이들 작품 하나하나의 크기도 엄청나다. 수묵화의 경우 가로 2m, 세로 10m 크기로 벽면 하나를 전부 차지하는 것도 있다. 돌로 된 고대 통화(通貨)의 크기도 자동차 바퀴만 하다. 양적인 이유이기도 하지만, 작품 하나하나가 크기 때문에 큰 공간이 필요하다.

일본은 양이 아니라, 질적 차원에서 승부를 낸다. 상설전시관의 수와 규모는 중국에 못 미치지만, 주기적으로 이뤄지는 특별전을 통해 변화를 준다. 치고 빠지는 이동형 문화예술전이다. 2014년 7월 현재 프리어미술관에서 열리는 일본 관련 특별전은 두 개이다. 우키요에(浮世?) 화가 고바야시 기요치카(小林淸親) 작품과, 다도(茶道)용 다구(茶具) 특별전이다.

고바야시는 원래 막부에 충성을 다한 사무라이다. 19세기 말 일본이 근대국가로 나아가면서 일자리를 잃자 화가로 나선다. 가스등과 전깃불이 들어서기 시작한 19세기 말 도쿄의 야경을 에도(江戶)시대 특유의 화풍인 우키요에에 담고 있다. 고바야시의 그림을 통해 근대도시로 변해가는 20세기 초 도쿄의 모습을 음미할 수 있다.

다도 전시관은 차를 담는 큰 항아리인 치구사(千草)가 중심에 있다. 높이 50㎝ 정도의 항아리 몇 개가 덜렁 전시돼 있다. 아무리 깨진 뚝배기라도 환경과 주변 장식에 따라 전혀 다르게 보이는 게 미적 상식일지 모른다. 다도 전체를 설명하기 위한 키워드로 치구사가 고급스럽게 전시돼 있다. 전시관 내에 아예 다다미 방을 따로 만들어 다기(茶器)도 전시했고, 항아리에 차를 넣어 보관하는 과정도 비디오로 만들어 상영하고 있다. 특별전 기간 중 주기적으로 다도 이벤트도 열린다고 한다.

필자가 최근 고바야시 특별전에 들렀을 때 전시관 손님은 10명이 채 안 됐다. 적은 수지만, 중국관에 비하면 많다. 중국관은 워싱턴에 놀러온 중국인이 가는 곳으로, 미국인이 들른다 해도 걸어가면서 그냥 지나치는 식의 관람을 하는 게 보통이다. 크기는 한데, 뭔가 구체적인 설명이나 아기자기한 맛이 없기 때문이다. 일본 전시관의 경우 다른 곳과 크게 다른 부분이 있다. 비만지수(BMI) 30을 넘어서는, 반바지 차림의 뚱뚱한 미국인이 드물다는 점이다.

예술에 조예가 깊은, 소위 인텔리풍의 미국인들이 주된 고객이다. 고바야시 관람객 중에는 돋보기를 들고 다니면서 작품 하나하나를 세밀히 관찰하는 사람도 있다. 미국인 가운데 다도를 알거나 직접 실행해본 사람은 천연기념물에 해당한다. 하지만 다구 전시관에서 만난 두 명의 미국 중년여성은 다도에 관한 해박한 지식과 함께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고 있다. 중국 전시관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다.

연방의회 북서쪽에 들어선 미국 국립미술관(www.nga.gov)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유화로 그린 초상화인 ‘지네브라(Ginevra de’ Benci)’가 전시된 곳이다. 유럽 밖에 존재하는 유일한 다빈치의 그림이다. 미국의 얼굴에 해당하는 국립예술관은 14세기 이후 예술작품을 전시하고 있다. 독립 역사가 238년에 불과한 ‘신생국가’여서인지 이집트, 그리스, 로마의 유물 유적은 별로 없다.

미국과, 선조인 유럽의 문화가 주류이다. 르네상스기의 유화와 인상주의 그림, 큰 그림을 즐겨 그리는 미국 화가들의 작품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전체 박물관을 통틀어 유럽과 미국 이외 지역의 예술품이 전시된 곳이 딱 한 군데 있다. 지하 1층 ‘갤러리 20C’에 전시된 청나라 도자기 전시관이다. 푸른색과 붉은 색감이 뛰어난 ‘늘씬한’ 청의 도자기 100여점이 전시되고 있다. 현대적인 감각의 도자기라 볼 수 있을 정도로 세련되고 기품 있게 느껴진다.

2009년 청나라 도자기 전시관이 처음 들어섰을 때, 필자는 중국 파워가 마침내 미국 예술의 안마당에 들어왔다고 생각했다. 중국 정부가 엄청난 돈을 들여 갤러리의 방 하나를 샀을 것이란 ‘음모론’(?)도 떠올랐다. 그러나 그같은 생각은 중국 전시관의 연혁을 설명해준 박물관 관계자를 통해 ‘사실무근’으로 판명됐다. 이 관계자는 이 전시관이 중국이 아니라 미국 전시관이란 점을 강조했다. 연방정부 자산이기에 중국이 상설 전시관을 가질 수가 없다고 강조했다.

전시된 작품은 필라델피아 출신 사업가 피터 와이드너(Peter Widener)가 1942년 제공한 기증품으로 중국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중국을 고려한 전시관이 아니라, 와이드너의 유지를 받들어 독자적 판단하에 전시하게 됐다는 것이다. 가끔씩 전시관에 들르는 중국인들로부터 오히려 불만에 찬 소리를 듣는 곳이 중국 전시관이라고 한다. 중국에도 없는 청의 귀중한 도자기가 미국에 있기 때문이다.

워싱턴 프리어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우키요에 화가 고바야시 기요치카 작품전(왼쪽)과 다도용 다구 특별전.

중국 정부의 입김 여부에 관계없이 중국 전시관은 국립예술관의 한구석을 지키고 있다. 제국주의 시대에 약탈당한 예술품이 아니라 워싱턴까지 진출한 자랑스러운 중국의 도자기쯤으로 받아들이는 중국인도 많을 것이다. 미국인은 물론 전후 배경을 모른 채 중국 도자기의 ‘위용’에 빠질 듯하다.

국립예술관에 상설전시관이 없는 일본 입장에서는 뭔가 만회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방법은 상설전시관이 아닌 특별전을 통한 일본 소프트파워의 확산이다. 제국주의 상처라고도 보여지는 중국 전시관과 달리, ‘일본의, 일본에 의한, 일본을 위한’ 소프트파워로서의 특별전이다. 프리어미술관과 똑같은 방식이다.

워싱턴 국립예술관 특별전은 세계적 이벤트로 평가된다. 미국 예술의 얼굴이라는 전시관의 위상에 걸맞게 세계적 수준을 자랑하는 작품들만이 엄선된다. 유럽과 미국 작품들이 대부분이다. 일본은 그같은 벽을 뚫고 들어간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이다. 1953년 1월 열린, 6세기부터 19세기에 걸친 일본화 전시회는 국립예술관 진출 1호 특별전이다. 전쟁의 기억이 생생하게 남아있던 미국인들이 일본인을 ‘잽(Jap)’이라 경멸하던 시기에 이뤄진 행사이다.

사실상 전승국 미국의 통치하에 있던 나라였지만 특유의 소프트파워를 선보이면서 자존심과 신뢰를 되찾으려 했을 듯하다. 이후 1960년 일본 토기인 ‘하니와(埴輪)’ 전시부터 2012년 이토 자쿠추(伊藤若?)의 ‘린파(琳派)’ 전시에 이르기까지 전부 6번에 걸친 특별전이 이뤄진다. 작품들은 전부 일본에서 공수된 것들로, 워싱턴 국립예술관을 위해 특별히 기획된 것이 대부분이다. 천황 개인이 소장한 작품처럼, 보통 일본인들이 접하지 못하는 예술품들도 전시된다.

특별전에 맞춰 도쿄에서 비행기를 타고 날아오는 일본인이 있을 정도이다. 질적 수준이 높은 작품이기 때문에 미국 전역의 아시아 전문 예술가들이 모이는 축제이기도 하다. 2012년 이토 자쿠추 전시회 때의 기억이지만, 관람객이 너무 많아 전시관에 들어가지도 못한 채 밖에서 기다릴 정도였다.

상설 전시관을 가진 여유 때문이지 모르겠지만, 특별전에 대한 중국의 관심은 일본보다 한 수 아래이다. 지금까지 두 번 열렸다. 1974년 고대유물과 1999년 고대황금 특별전이다. 1974년 전시는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베이징 방문을 축하하는 행사로, 1999년 전시는 미·중수교 20주년 행사의 일환으로 열렸다. 내용물의 대부분이 수천 년 전 고대 문화유적들로, 오늘과 내일의 중국을 보여줄 수 있는 살아있는 소프트파워와 무관하다.

미술관, 박물관을 무대로 한 중·일 소프트파워의 현장은 일본의 압승처럼 느껴진다. 중국이 길고 긴 역사를 자랑하는 문명국가라고 하지만, 투박하게 전시된 고고학적 유물 유적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극히 드물 듯하다. 일본 요리처럼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끌어들이는 것이 일본 소프트파워의 특징이다. 문화 그 자체에 대한 완성도만이 아니라, 조직적이고 체계적인 운영으로 사람의 마음을 끈다. 사회주의체제의 중국이 산전수전 다 겪은 일본 수준의 문화 이벤트를 창출해 내기는 어렵다.

그러나 모든 것이 그러하듯 누구에게도 ‘한 방’은 있다. 지난 7월 4일 35도에 육박하는 무더위 속에서 열린 스미스소니언 포크 페스티벌(Folk Festival)이 바로 그 증거이다. 주인공은 중국이다. 주제는 문화와 전통이다.

포크 페스티벌은 스미스소니언이 매년 미국 독립기념일을 전후해 벌이는 초대형 야외 이벤트이다. 문화를 키워드로 삼아 먹고, 춤추고, 노래하고, 서로의 우의를 다지는 행사이다. 프리어미술관 맞은편의 워싱턴몰 동쪽 한가운데서 이뤄졌다. 보통 특정국가의 문화를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식으로 열린다. 문자 그대로 국가를 주제로 한 소프트파워 광장이다. 지난해에는 헝가리가 주인공으로, 노래·춤·음식·그림에 관한 문화행사가 10여일간 계속됐다. 이번에 중국은 케냐와 함께 초대된, 2014 포크 페스티벌 주최국이다.

중국의 모든 것이 그러하듯 소프트파워 현장의 양적 규모가 엄청나다. 몰 한가운데 중국 문화공간 입구에 대나무로 만든 큰 성(城)이 하나 들어서 있다. 가로 60m, 높이 25m로 성 위에는 수십 여개의 깃발들이 휘날리고 있다. 뒤쪽에는 연방의회 건물을, 앞쪽에는 워싱턴 기념탑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워싱턴, 아니 세계의 심장부를 중국성이 지키고 있는 모양새다. 어떤 의도로 엄청난 성을 만들었는지 이해하기 어렵지만, 물리적 차원에서의 대국(大國)임을 과시하려는 의도로 비쳐진다.

적(赤)·황(黃)색으로 꾸며진 성은 중국에서 직접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분해해서 싣고온 뒤 다시 조립한 것이다. 성 하나를 갖고 오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비용이 들었을 듯하다. 크게 볼 때 중국관은 1개의 대형 공연장과 12개의 문화 전시공간, 2개의 식당으로 구성돼 있다. 개월각(開月閣)이란 이름의 공연장은 대형 천막 아래 500개 정도의 의자를 배치해 두고 있다. 필자가 방문했을 때는 마침 중국 내몽골의 전통음악 연주가 진행되고 있었다.

몽골 특유의 저음이 공연장 관람객들을 흥분시킨다. 몽골 스타일 머리에다 전통의상 차림이다. 자리가 꽉 채워진 것은 물론 천막 밖까지 관람객으로 넘친다. 이어진 인형극도 관객으로 터져 나간다. 고음의 징소리와 함께 치러진 용무(龍舞)는 전원 기립 박수를 받았다. 천막 밖에서 일을 도와주고 있는 젊은 중국인에게 중국관을 지키는 중국인 직원 수를 물어봤다. “공연과 문화전시를 위해 전부 300명 정도가 워싱턴에 왔다. 중국 정부 주도로 전국에서 왔기 때문에 사실 서로 잘 모른다.” 식당의 요리사와 음료수를 파는 사람들도 중국에서 날아온 일행이라고 한다.

풀밭 위에 설치된 문화전시공간 쪽으로 들아가 봤다. ‘인민공원’이란 이름의 넓은 공간을 중심으로 12개 무대가 설치돼 있다. 50명 정도가 앉을 수 있는 공간이 무대마다 설치돼 있다. 연(鳶)·다도·음식·종이접기·의복·붓글씨·서도·판다·향·염색·조각·떡·악기 등, 중국이 가진 모든 전통문화가 전시되고 있다. 직접 만들어보기도 하고, 중국인 전문가로부터 강연을 듣는 곳도 있다. 윈난성에서 온 소수민족의 화려한 옷은 특히 주목의 대상이 됐다.

미국인들은 가족 단위로 몰려가 사진 찍기에 분주하다. 세계 어디를 가도 중국 식으로 행동하는 것은 중국인들의 특징이자 습성 중 하나이다. 웃통을 벗고 잔디밭에 누워 잠을 자는 중국인들이 곳곳에 있다. 미국인들이 신기한 모습으로 지켜보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포크 페스티벌에서 만난 중국 소프트파워는 프리어미술관 내 중국 전시관과 일맥상통한다. 양으로 밀어붙이는 백화점식 이벤트이다. 사실 수준은 일본, 나아가 한국에 비교할 바가 못 된다. 공연장에서 춤을 추는 소수민족 여성은 난생처음 무대에 선 듯한 아마추어로 느껴진다. 뭔가 빠져 있고, 엉성하다. 중국 전통요리를 경험하려고 식당에 가봤지만, 중국산 인스턴트식품을 전자레인지에 녹여 파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그같은 ‘부정적인(?)’ 모습은 필자와 같은 아시아인만이 느낄 수 있다. 아시아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미국인들은 다르게 본다. 엄청난 크기에다, 뭔가 시끌벅적하고 이국적인 분위기만 내도 대만족이다. 패스트푸드로 다져진 몸인 만큼 화학조미료로 범벅이 된 중국 음식도 최고의 요리로 느껴진다. 독립기념일을 맞아 지방에서 올라온 미국인들에게는 아시아의 신비, 그 자체로 느껴질 듯하다.

소수정예의 인텔리에 초점을 맞춘 실내형 소프트파워는 일본의 장기이자 특징이다. 인해전술에다 ‘월마트 스타일’로 이뤄지는 대규모 장외형 소프트파워는 중국의 특징이자 자랑이다. 바다나 하늘만이 전쟁 무대인 것은 아니다. 워싱턴 한복판도 중·일 소프트파워의 격전장으로 뜨겁게 달궈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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