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12일 전남 순천에서 발견된 변사체가 40일이 지나서야 유병언(73) 전 세모그룹 회장으로 밝혀지자, 경찰의 허술한 초동 수사가 도마에 올랐다. 특히 변사체가 유 전 회장이 한때 머물렀던 은신처에서 불과 2.5㎞ 떨어진 곳에서 발견됐는데도 40일 동안 단순 변사로 취급하는 바람에, 그 이후에도 유씨를 추적·수색하느라 국가적으로도 엄청난 낭비를 초래했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순천경찰서는 22일 "변사자 발견 당시 부패가 80%가량 진행돼 신원 확인이 불가능했던 데다, 행색이 노숙자 같았고, 유병언으로 의심할 만한 정황이 없어 '무연고자 변사사건'으로 처리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경찰이 변사자와 함께 발견된 수많은 유류품에 조금만 주의를 기울였더라면, 지금보다 훨씬 일찍 유씨의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유병언 발견 당시.

애초 변사체 발견 현장에서는 빈 스쿠알렌 병(길이 8.5㎝) 1개와 빈 막걸리 병 1개, 빈 소주병 2개, 천 가방 1개, 직사각형 돋보기, 상의 주머니에서 나온 유기질 비료 포대 1개, 검은콩 20알, 먹다 남은 육포 등이 함께 발견됐다. 이들 유류품에는 유 전 회장과의 연관성을 알아차릴 수 있는 힌트가 수없이 많았다.

먼저 스쿠알렌 병. 이 제품은 세모 계열사인 한국제약이 생산한 것으로, 세모 계열 판매회사를 통해 일반에 판매되는, 대중적인 보조식품으로 잘 알려져 있다. 특히 세모 스쿠알렌은 일반인들에게도 낯익은 제품이다. 이 병에는 제조회사 이름이 적혀 있어, 경찰이 조금만 관심을 기울여 확인했다면 변사자의 신원을 추정하는 데 단서가 됐을 수 있었다.

천 가방은 유 전 회장과의 관련성을 입증할 수 있는 결정적 증거였으나, 경찰은 이것도 간과했다. 천 가방 안에서는 한쪽에 '꿈같은 사랑'이라는 글귀가 가로로 적혀 있었다. '꿈같은 사랑'은 유 전 회장이 지난 1994년 출간한 저서의 제목이다.

비록 더러워지긴 했지만 유씨가 입고 있던 옷도 눈길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가 입은 상의 점퍼는 고가의 이탈리아 브랜드 '로로피아나'로 밝혀졌다. 간단한 인터넷 검색만으로도 이 제품이 수백만원이 넘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시골의 산기슭 매실밭에서 발견된 노인이 이런 고가의 점퍼를 입었는데도 '단순 노숙인'으로 판단한 경찰의 어이없는 실수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무엇보다 유씨가 머물던 별장에서 그렇게 가까운 곳에서 발견된 70대 노인의 시신에 대해 경찰은 '혹시 유병언 아닐까'라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경찰은 많은 정황 증거들을 간과한 채 검찰에도 단순 변사로 보고했고, 검찰도 유씨일 가능성을 의심하지 않은 채 의례적으로 지휘했다.

경찰은 결국 지난 21일 밤 국과수로부터 "DNA 분석 결과 유씨가 맞다"는 통보를 받은 뒤에야 유류품에 대한 재조사에 나서 이 정황 증거들을 뒤늦게 점검했다고 밝혔다.

우형호 순천경찰서장은 이날 브리핑에서 "유류품이 다수 있었으나 당시에는 간과했다"며 잘못을 인정했다.

유병언 전 회장으로 추정되는 변사체가 전남 순천시 서면 학구리의 한 매실밭에서 발견됐다. 경찰과 국과수는 DNA검사결과 유병언 회장으로 확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