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가족들은 비를 맞으며 지장사 법당 주위를 돌았다. 가슴에 안았던 영정과 위패를 태웠다. 아이들이 생전에 입었던 옷과 운동화, 곰인형, 연예인 얼굴이 그려진 쿠션 같은 것들도 하나둘 재로 변했다. 한 어머니는 "도저히 못 보겠다"며 두 눈을 질끈 감고 영정을 소각장에 넣었다. 영정을 꼭 끌어안은 한 아버지는 "보내기 싫다"고 버텼다. "○○아빠, 이제 그만 보내줘야지. 그래야 ○○이가 좋은 데 가지." 다른 아버지가 다가와 다독이자 그는 마지못해 아이의 영정을 건넸다. 돌아선 아버지는 밖으로 나가 담배를 꺼내물었다. 한 어머니는 옷가지 하나하나를 태울 때마다 옷에 얼굴을 파묻고 울었다. 고(故) 이보미양의 어머니 정은영(44)씨는 운동화를 태우며 말했다. "보미야 잘가. 예쁘게 신고 잘 지내. 사랑해 보미야." 지켜보던 안산 단원고 학생들과 유가족들은 입술을 깨물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49일째인 3일 안산 지장사와 하늘추모공원, 평택 서호추모공원, 화성 효원추모공원 등 곳곳에서 희생자들의 명복(冥福)을 비는 49재(四十九齋)가 열렸다.
"아이들이 좋은 곳으로 갈 수 있게 배웅을 잘 해주세요. 오늘만 실컷 울고, 내일부턴 울지 마십시오." 스님의 말이 끝나자 서호추모공원 추모실 안의 부모들이 일어나 울며 큰절을 했다. 스님이 아이들 이름을 하나하나 호명했다. 아이의 위패를 양복 안에 품은 채 이곳에 왔던 한 아버지가 앞으로 나와 절을 올렸다. 그는 양복 호주머니에서 지폐를 꺼내 자식의 영정 앞에 고이 놓았다.
희생 학생의 학부모들은 전날까지도 이날 49재를 치러야 할지 고민했다. 세월호 침몰부터 따지면 49일째가 맞지만 "배 안에서 아이들이 2~3일 정도 살아 있었을 것"이라며 아직 49재를 치를 때가 아니라고 반대하는 부모들이 적잖았다. "장례 절차를 다 마치면 세월호 사건도 사람들 기억 속에서 사라질 것"이라고 걱정하는 부모들도 있었다.

결국 이날 단원고 학생 67명과 교사 3명의 가족들이 49재를 함께 치렀다. 정은영(44)씨는 "어떻게든 아이와 끈을 놓고 싶지 않아서 사망 신고도 안 하고 있었는데 49재 치르려고 어제 큰딸이랑 동사무소 가서 신고하고 왔다"고 말했다. 정씨는 "어제만 해도 못할 짓 한 것 같아 힘들었는데 49재 치르고 나니까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제는 내려놓을 때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다른 가족들은 시신 발견 날짜에 맞춰 49재를 준비하거나 종교적 신념에 따라 따로 추모 행사를 갖기로 했다. 고 김동혁군의 어머니는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 시계는 4월 16일에 멈춰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벌써 49일이나 됐느냐'며 아이들을 잊어가고 있어요."
세월호 갑판에서 구조되기 직전 '살려달라'는 친구의 비명 소리를 듣고 배 안으로 들어갔다 숨진 김주아양의 가족은 낮 12시쯤 서호추모공원을 찾았다. 성당에 다니는 주아양 가족은 "49재 대신 오늘 저녁에 미사를 치르기로 했지만 주아 친구들의 마지막을 지켜보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했다. 아이들의 탈출을 도왔던 고 양대홍 세월호 사무장의 형 양석환(49)씨도 이곳을 찾아왔다. 양씨는 "동생이 지켰어야 했고 지키려고 했던 아이들이라 꼭 인사를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승무원 가족'이라는 이유로 진도에서도 학부모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던 양씨는 이날도 먼발치에서 아무 말 없이 의식을 지켜봤다. 그는 "지방선거가 끝나고 브라질월드컵이 시작되면 사람들이 세월호를 잊을 것 같다"고 말했다. "세월호 희생자들을 잊지 말아주세요."
이날 오전 10시쯤 전남 진도 팽목항에선 희생자의 넋을 위로하고 실종자의 귀환을 기원하는 법회(法會)가 열렸다. 항구 방파제 위 조계종 법당에 모인 스님과 신도 수십여명은 독송을 하며 희생자·실종자·가족들의 마음을 달랬다. 실종자를 위한 49재를 열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아직 시신을 찾지 못한 가족들의 심정을 고려해 법회로 대체했다. 염불 소리가 멎자 실종자 가족의 통곡 소리가 뒤를 이었다. 49재조차 치를 수 없는 이들의 울음은 깊고 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