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달도 어김없이 이메일을 받았다. 몇 년 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일본군(軍) 위안부 사진전을 취재하다 만난 현지 NGO에서 보낸 것이다. '일본명예채무촉구재단'(SJE)이란 이름의 이 단체는 1992년부터 매달 둘째 화요일 낮 헤이그의 일본 대사관 앞에서 집회를 갖고, 일본 총리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을 전달해왔다. 태평양전쟁 당시 인도네시아를 점령한 일본은 현지 네덜란드 주민 30만명을 수용소에 가두고, 젊은 여성들을 강제로 성 노리개로 삼았다. 이에 대한 일본 정부의 공식 사과와 배상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은 것이다.
지난달 공개 서한은 헤이그 핵안보 정상회의에 참가한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암스테르담의 안네 프랑크 기념관을 찾아 "역사적 사실에 겸허해야 하며, 역사적 교훈과 사실을 다음 세대에 전하고 싶다"고 말한 사실을 언급했다. 일본명예채무촉구재단은 '귀하는 일본군도 (독일의) 홀로코스트와 같은 대량학살을 시도했다는 사실을 일본 국민들이 알도록 가르쳐야 한다'고 썼다. 이런 대목도 있다. '일본 교과서는 사실을 무시하고 잘못된 인상을 심어주고 있다.' 침략 전쟁의 진상과 책임을 제대로 기술하지 않고 가르치지 않는 일본 역사 교과서와 역사 교육의 문제를 꼬집은 것이다. 이번 달 받은 이메일에는 234번째 공개 서한이라고 적혀 있었다. 20년 가까이 일본 정부를 상대로 서한을 보내고 있다는 뜻이다.
아베 총리는 안네 프랑크 기념관을 찾아 나치즘을 비판하는 척하면서 독일 언론과 가진 인터뷰에선 "일본은 독일의 화해와 사과 방식을 따를 수 없다"고 말했다. 전후 독일이 취한 철저하고 지속적인 사과·배상·처벌을 반대하면서 한국과 중국의 요구를 거부한 것이다. 그러면서 "일본은 빈곤한 아시아 국가에 '개발 협력' 방식으로 지원을 계속했다"며 엉뚱한 주장을 폈다. 돈으로 사실상 '사죄(謝罪)'를 대신했다는 얘기였다.
아베 총리의 빗나간 역사의식은 2차 대전 후 일본의 전쟁 책임을 따지는 도쿄 재판이 형식적이었기 때문이다. 수천만 아시아인을 죽음에 몰아넣은 천황제 파시즘의 책임은 극소수 전범들이 뒤집어썼다. 군국주의에 협력하거나 동조한 일반 국민들의 책임은 거론되지도 않았다. 오히려 원폭 투하를 구실 삼아 희생자 코스프레를 해왔다.
아베 정권을 비롯한 일본 내 극우 세력들은 그간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식민 지배에 대한 사과와 반성을 촉구하는 한국의 요구를 까탈스러운 이웃의 트집 정도로 여겨왔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상황이 바뀌고 있다. 네덜란드 의회를 비롯, 미국과 유럽의회, UN은 속속 위안부 결의안을 통해 일본의 사죄를 촉구했다. 미국의 여러 자치단체에서도 소녀상과 기림비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위안부 문제에 관한 한, 국제 연대가 성공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는 '침략'을 '진출'로 미화하고, 전쟁 책임을 제대로 기술하지 않은 일본의 역사 교과서와 역사 교육에 대해 '국제 공조'의 틀을 짜야 한다. 일본군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국제 연대가 성공을 거뒀듯, 침략 전쟁을 미화하는 일본 역사 교과서에 대해서도 전 세계가 일본을 상대로 항의하도록 판을 키워야 한다, 네덜란드는 일본의 역사 왜곡에 맞설 국제 연대에서 우리와 걸음을 함께할 소중한 이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