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77년 문을 연 성동구치소 전경.


[편집자 주]
이름을 밝히지 않은 50대의 필자는 최근 전세대출금을 갚지 못하는 바람에 횡령죄로 법정구속돼 서울 성동구치소에서 3개월 동안 지냈다. 필자는 자신이 겪은 구치소 풍경을 르포 형식으로 담아 《월간조선》에 보내 왔다. 필자의 주관이 독자에게 다소 왜곡되게 비칠 수 있으나 경험과 사실에 근거해 썼다고 필자는 말했다. 그의 체험기를 3회에 걸쳐 연재한다. 참고로, 형무소 이감 전의 구금 중인 상태도 모두 '수형자'로 통일했다.

한국의 재판장들은 선고할 때 ‘그러나’라는 말을 좀체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나’는 앞의 내용을 부정하고 새로운 내용을 이야기할 때 사용하는 접속부사다. 보통의 한국인이라면 ‘그러나’란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안다.

재판장들은 '그러나' 대신에 '단'이라는 말을 애용한다. '단'은 앞의 말을 받아 예외적인 사항이나 조건을 덧붙일 때 그 말머리에 사용하는 접속부사로, '그러나'와 거의 비슷한 뉘앙스를 풍기는 말이다.

저축은행에서 6000만원을 대출받았다가 갚지 않았다는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어 1심 선고를 기다리던 나에게 이 '단'이란 말은 지옥행의 시작이었다. 불구속의 반대말은 구속이다. 불구속 상태인 나에게 재판장이 선고 시에 '단'이란 말을 사용한다는 것은 나를 구속시키겠다는 의미와 다름없다. 내 예상은 적중했다.

"단, 피고인의 경우에는 반성의 기미가 없어 징역 10월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한다."

재판장의 선고가 끝나기 무섭게 교도관 한 명이 내 뒤에 다가와 왼쪽 겨드랑이 밑으로 자신의 오른팔을 집어넣어 팔짱을 끼더니 나를 법정 밖으로 끌어냈다. 또 한 명의 교도관은 내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내 등 뒤에 따라붙었다. 더위가 갓 시작되던 2011년 어느 금요일 오전에 나는 이렇게 법정구속되었다.

나는 교도관 두 명의 감시 속에 법정 옆에 있는 방으로 끌려갔다. 사람을 가두기 위해 쇠창살로 만들어 놓은 작은 감옥이 그곳에 있었다. 법정에서는 전혀 보지 못한 수십 명의 교도관이 수갑과 포승줄을 들고 저승사자와 같은 모습으로 그 방에서 수형자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방에 들어서자 한 교도관이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양손을 앞으로 내미세요."

말은 부드러웠다. 그러나 교도관의 행동은 거칠었다. 내가 머뭇거리며 잠깐 시선을 딴 데로 돌리자 내 왼손을 억세게 붙잡고는 수갑을 채웠다. 차가운 수갑의 촉감이 나를 섬뜩하게 했다.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 어깨를 약간 비틀며 손을 움직이자 수갑이 팔목 안쪽으로 조여들어 왔다. 가만히 있으면 괜찮은데, 손을 움직이면 조여드는 구조다. 팔목에 아픔이 느껴지면서 머릿속이 순간적으로 맑아졌다. 주변의 소리가 다시 들렸다.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수갑이 조여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양손을 깍지 끼는 수밖에 없었다.

여자 수형자와 휴대폰

50년을 살아오면서 처음 당하는 인신구속이었다. 내가 구속되었다는 사실을 외부에 알리고 구원을 요청할 수 없다는 사실이 나를 아주 답답하게 했다. 나는 법정에서 구속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혼자 법정에 나왔다.

나의 변호인은 국선변호사였는데, 이날 법정에 나오지 않았다. 형사사건 변호사들은 무슨 이유에서인지 선고 때 법정에 나오지 않는다. 그게 변호사 세계의 관행인 모양이다.

나는 고립돼 도움조차 받을 수 없는 고립무원의 세계에 갇혔다. 아랫배 한가운데서 뜨거운 열기가 치솟더니 그 열기가 머리 꼭대기까지 올라왔다. 나를 법정구속시킨 재판장에 대한 분노였다. 재판장의 이름 석 자가 욕설과 함께 터져 나올 듯했다. 저축은행에서 대출받은 돈을 갚지 않은 것이 감옥에 갈 만큼의 큰 죄가 되는지, 나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노로 인해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이 상황을 벗어날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속으로 분을 삼키고 있는데, 한 여자가 여성 교도관에게 이끌려 방으로 들어섰다. 이날의 두 번째 법정구속자였다. 검은색의 짧은 치마에 하얀색 블라우스, 옅은 보라색 계통의 재킷을 걸친 미모의 여자였다. 스커트 밑의 두 다리는 죽 곧았고 상앗빛으로 탱글탱글했다. 나이는 많아 보았자 30대 중반인데, 갸름한 계란형의 얼굴에 피부는 뽀얀 우윳빛이다.

그 여자는 시선을 벽에 고정시킨 채 담담하게 앉아 있었다. 나처럼 불안한 기색이 아니었다. 그 옆에 나란히 앉은 여성 교도관이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게 들렸다.

"가족들이 대책을 세운다고 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교도관들에게는 이미 손을 써 놓았으니 감옥생활이 그리 나쁘진 않을 거예요. 조금만 고생하면 곧 나갈 겁니다."

그 여자는 소지품이 없는 걸 보니 구속을 각오한 것 같았다. 여성 교도관은 그녀를 위해 물을 가져다주고, 화장실로도 안내했다. 화장실에 들어간 여자는 한참 후에 나왔다. 그동안 여성 교도관이 화장실 앞을 지켰다. 화장실을 나온 여자의 눈 주변이 약간 충혈돼 있고 양손엔 물기가 가득했다. 화장실 안에서 실컷 울고 나온 표정이었다.

처음엔 몰랐으나 자세히 보니까 그 여자는 나처럼 수갑을 차고 있지 않았다. 소지품을 보관하는 흰 비닐봉지도 갖고 있지 않았다. 여성 교도관이 특별히 신경 쓰는 것으로 볼 때 뭔지는 몰라도 배경이 든든한 것 같았다.

얼마 뒤 총 8명의 수형자가 탄 호송버스에는 수형자의 수와 거의 비슷한 수의 교도관이 탑승했다. 호송버스는 유리창에 창살을 덧씌워 놓아 밖에서는 안을 들여다볼 수가 없도록 되어 있고, 마찬가지로 버스 안에서도 창밖을 구경하기가 힘들었다.

호송버스 안에서 흘낏 쳐다보니 혼자 앉은 여자 수형자는 양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휴대폰으로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초범이어서 몰랐지만 동료 수형자들의 말에 의하면 구치소에 입감되기 전까지 휴대폰을 압수하지 않는 마음씨 좋은 교도관도 있다고 했다.

성동구치소 입구.

성동구치소에서의 첫날

성동구치소는 서울 송파구 가락동 부근에 있다. 문을 연 1977년 당시에는 주변이 외진 뽕밭이었으나 개발이 진행된 지금은 고층아파트 단지가 즐비한 주택가 한가운데다. 감옥에서 아파트 베란다와 응접실을 볼 수 있고, 아파트에서는 수형자들의 수형생활을 마치 야구경기 구경하듯이 관람할 수 있다.

호송버스가 성동구치소 입구를 통과하자 육중한 철문이 ‘꽝’ 하는 굉음을 내며 닫혔다. 동굴 같은 구치소 내부의 통문을 따라 깊숙이 안쪽으로 들어갔다. 일정한 간격으로 서 있는 철창도 통과했다. 이날 나와 같이 성동구치소에 입감된 입소자는 모두 12명이었다. 북부지방법원 출신이 8명, 동부지방법원 3명, 성남지원이 1명이었다.

교도관은 우리를 교회당처럼 생긴 사무실로 데리고 갔다. 어깨에 무궁화 하나를 단 교도관이 우리 앞에 섰다.

“지금부터 하나씩 순서대로 지시할 테니 지시에 따르세요. 먼저 하얀 봉지를 열어서 그 안에 들어 있는 돈만 끄집어 낸 뒤 봉지는 다시 묶으세요. 금액을 정확하게 확인하세요. 내가 이름을 부르면 한 명씩 앞으로 나오세요.”

교도행정은 만일의 경우에 발생할 책임추궁에 대비해 모든 게 서류로 작성된다. 수형자들의 숫자를 세고 또 세고 이를 서류로 정리하는 게 구치소의 일과다. 도망갈 곳도 없는 밀폐된 공간에서 일이 처리되므로 사회에서처럼 “빨리, 빨리” 하며 서두르지 않는 곳이 감옥이다.

교도관은 경리장부처럼 생긴 공책에 내 이름과 금액을 적은 뒤 그 장부를 내게 보여주고는 “맞으면 사인하라”고 했다. 돈 확인이 끝나자 구치소 의료진이 나와서 “아픈 곳이 있으면 신고하라”고 했다. 고혈압 환자는 즉석에서 혈압을 체크했다.

의료진은 수형자들에게 사회에서 가지고 온 약이 있으면 제출하라고 말했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환자 수형자가 여러 개의 약 봉지를 꺼내 놓았다. 알고 보니 그 수형자는 히로뽕 중독 환자였다. 히로뽕을 끊은 후 나타나는 금단증상 때문에 말을 못하고 몸을 가누지 못했다.

돈 확인과 건강 체크가 끝나자 교도관은 수형자 번호가 새겨진 명찰을 나눠주었다. 내 수형자 번호는 339번이었다. 기억하기 좋은 숫자였다. 그 순간부터 내 이름은 없어졌다. 인간 ‘○○○’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수형자 번호 339번이 대신했다. 지금부터 나에 대한 모든 호칭은 339번이다.

항문 검색

나는 법정구속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래위 검은색 여름 양복에 하얀색 와이셔츠를 입고 법정에 나갔다. 얇은 검은색 여름양복에 시퍼런 곰팡이가 피는 것이 눈에 선했다. 그렇다고 해서 수형자가 무슨 염치로 좀약을 요구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시키는 대로 양복을 잘 개어서 더플백 속에 넣었다. 교도관은 더플백 겉에 붉은색 색연필로 내 수형자 번호를 적고는 자물쇠를 채웠다.

팬티와 러닝셔츠만 걸친 채 대기하고 있던 나는 339번을 부르는 소리에 옆방으로 들어갔다. 방은 널찍하고 컸다. 교도관 한 명이 철제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교도관이 약간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몸수색을 실시하겠습니다. 사회 일각에서는 몸수색이 인권유린 행위라고 하여 비판하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흉기나 히로뽕 같은 불법물을 몸에 숨기고 교도소에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조치이니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우선 팬티와 러닝셔츠를 벗고 일어나 주십시오.”

나는 벌거벗은 몸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교도관이 지시하는 대로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겨드랑이에 숨겨 놓은 게 없는지를 확인하는 절차다. 이어 항문검사가 실시되었다. 항문검사는 면도날이나 히로뽕, 담배 등을 콘돔에 넣어서 항문 속에 숨겨 놓지나 않았는지를 확인하는 검사다.

군에 갔다온 사람들은 알겠지만 군의 치질검사를 연상하면 된다. 엉덩이를 검사관 쪽으로 향하게 한 후 허리를 굽히고 양손으로 항문을 까발려 검사관에게 항문 속을 보여주는 식이다. 이 검사는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더 수치심을 느끼기 때문에 인권유린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법무부 교정본부는 알몸수색이 인권유린이란 이유로 비판을 받자 엑스레이 투시 방식으로 개선했다. 양손으로 자신의 항문을 까발리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 렌즈가 설치된 변기 형태의 공간에 쪼그리고 앉아서 잠시 대변보는 자세를 취하게 하는 것이다.

알몸수색이 끝난 나에게 교도관은 상하의 모두 고동색인 수형자복과 수건, 비누, 치약, 칫솔이 든 세면용 비닐백을 주고는 “샤워하고 옷을 갈아입으라”고 했다. 감옥에서의 첫 샤워이자 수형자복을 갈아입는 순간이다. 샤워장은 여름인데도 뜨거운 물이 나왔다.

샤워장 입구엔 하얀색과 검은색 고무신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주인이 정해져 있는 게 아니고 발에 맞는 신을 고르면 된다. 나는 흰 고무신을 신었다. 교도소 복도는 오래된 시멘트 바닥이어서 매우 울퉁불퉁하다. 맨발에 고무신을 신으니 걸을 때마다 발밑이 따끔따끔했다. 고무신은 구두나 운동화와는 달리 쿠션감이 전혀 없었다.

세상엔 공짜가 없다

샤워장 밖에는 신입 수형자들을 위한 간이식당이 있었다. 오전 10시부터 수갑을 차고 포승줄에 묶인 채 사람들의 이목을 피하기 위해 어두침침한 곳을 마치 좀비처럼 흐느적거리며 걷다가 처음으로 대하는 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새파랬고 서산으로 지는 석양은 이글이글 불타는 듯했다. 8시간 만에 다시 대하는 바깥은 그렇게 밝고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밖은 훤했지만 이미 저녁식사 시간이란다. 군대에서 지겹도록 대했던 1식3찬용 플라스틱 식판 위에 쌀과 보리가 반반씩 섞인 밥과, 참치가 잠시 샤워하고 나간 국, 김치와 간장에 절인 양파에 삶은 통감자 하나가 오늘의 저녁 메뉴였다.

밥을 먹으면서 둘러보니, ‘입감 동기’ 수형자들이 입고 있는 옷 색깔이 달랐다. 나를 포함한 11명은 아래 위가 모두 고동색 수형자복인데 비해 두 명은 파란색이다. 파란색 수의(囚衣)는 벌금을 내지 못해 감옥에 온 벌금형 수형자가 입는 옷이다.

벌금형은 선고가 있은 지 30일 안에 벌금을 납부하지 않으면 노역장에 수감돼 노역형을 살아야 한다. 벌금형을 선고받은 수형자는 벌금을 완납하면 그 즉시 석방되므로 수형자들 사이에서는 굉장히 부러운 존재다.

파란색 수형자복을 입은 40대의 남자는 지하철 안에서 물건을 팔다가 체포되어 경범죄 위반으로 벌금 30만원을 선고받았으나 벌금 낼 돈이 없어 감옥행을 선택했다. 벌금이 30만원이라면 수형자들의 하루 노역비가 5만원이므로 엿새를 복역해야 한다. 나는 그와 같이 샤워를 했으므로 그가 사회에서 입고 있었던 팬티와 러닝셔츠를 보았다. 팬티는 대변 누는 쪽이 걸레처럼 헤어져 구멍이 나 있었고, 러닝셔츠는 얼마나 오랫동안 빨래를 하지 않았는지 달걀 껍데기처럼 누르스름했다. 그의 고단한 삶이 그의 내의 속에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파란색 수형자복을 입은 다른 수형자는 서울 청량리에서 술집을 운영하는 유흥업소 사장이었다. 여성 봉사원을 둘 수 없는 주점에서 도우미를 고용했다가 단속에 걸렸다. 여러 번 적발되다 보니 벌금 액수도 상당했다.

몇몇 교도관이 우리가 저녁을 먹는 자리에 찾아와 유흥업소 사장과 알은체를 했다. 연락을 받은 모양이었다. 교도관이 특정 수형자에게 알은척을 한다는 것은 그 수형자의 감옥생활이 편안하고 안락할 것임을 의미한다. 유흥업소 사장은 교도관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주임님(교도소 안에서 수형자들은 교도관을 이렇게 부른다), 제가 발목을 다쳐서 쪼그려 앉기가 불편합니다. 양변기가 있는 방에 배치되도록 힘 좀 써 주세요.”

감방 내의 화장실은 99%가 쪼그리고 앉아서 대변을 보는 구조다. 앉아서 누는 양변기는 노약자와 장애인을 위하여 설치돼 있을 뿐이다. 약 2000명의 수형자가 수감돼 있는 성동구치소에는 10군데밖에 없다. 양변기가 있는 감방에 배치되는 것 역시 수형자에게는 특혜다.

교도관들이 인사를 나누고 떠나자 유흥업소 사장이 얼굴 가득히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저 주임님들이 모두 우리 집 단골손님들이요. 교도관 봉급이 몇 푼이나 됩니까? 우리 가게에 올 때마다 내가 공짜로 접대했지요. 벌금형을 선고받은 후 도움을 청했더니 보답 차원에서 나를 찾아온 거요. 나가면 크게 한턱 쏘아야지요.”

신세를 지면 갚는 게 세상 이치 아닌가? 인간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감방 안의 로열석은 출입문 앞자리

식사가 끝나자 수형자들은 5명씩 조를 이뤄 신입 수형자들이 수감되는 감방으로 이동했다. 나는 4명의 수형자와 함께 신입 방에 갇혔다. 신입 방은 2.2평이다. 가로 6.6m, 세로 6.6m보다 약간 더 크다. 신체 건장한 다섯 명의 남자가 이 비좁은 방에서 생활해야 한다. 복도 쪽에 출입문이 있고, 그 반대편이 화장실이다.

세면도구가 든 비닐 백을 들고 신입 방에 들어선 나는 내 자리가 어디인지 몰라 엉거주춤 서 있었다. 히로뽕 환자는 감방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출입문 앞에 누워 버렸고, 나는 화장실 쪽에 자리를 잡았다. 장님 나라에서는 애꾸눈이 왕이다. 마찬가지 이치로 수형자들 사이에서는 별(전과)이 많은 사람이 대장이다. 사기 전과 3범이라는 한 ‘떠버리 수형자’가 감옥생활의 관록을 밑천으로 감방에서 두 번째 로열석인 화장실 앞자리를 차지했다.

감방에서 최고의 로열석은 출입문 앞이다. 두꺼운 철문을 대하고 있어서 답답하게 보이지만 밥과 반찬이 들어오는 배식구가 뚫려 있어서 통풍이 잘되고 항상 앉아 있어야 하는 감방생활에서 드러누울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화장실 옆에 싱크대가 있고, 싱크대 옆 공간에 담요가 쌓여 있었다. ‘떠버리 수형자’는 담요를 꺼내 우리에게 한 장씩 나눠 주었다. 이 방에 잠시 머물렀던 수많은 수형자들이 사용했던 꼬질꼬질한 담요였다.

담요를 받는 순간 허연 가루가 공중에 날렸다. 엄청난 양의 먼지였다. 발 고린내 비슷한 고약한 냄새가 코끝에 진동했다. 비위가 약한 나는 고린내 때문에 속이 울렁거렸다. 어디가 발을 덮은 부분이고, 어디가 머리 쪽인지도 전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떠버리 수형자’가 안내 방송을 했다.

“세탁을 안 한 담요니까 먼지가 엄청나게 날 겁니다. 털 생각은 하지 마시고 조심조심 다루세요. 담요 하나를 길게 펴서 3분의 1로 접은 뒤 바닥에 깔고 그 위에 누우세요. 한 사람이 누울 수 있는 공간은 그게 답니다. 그렇게 해야 다섯 명이 잘 수 있습니다. 추우면 담요 속에 들어가시고 베개는 담요 한 장을 둘둘 말아서 두 사람이 같이 베도록 하세요.”

내가 누울 수 있는 공간은 담요의 3분의 1에 불과했다. 꼬질꼬질한 담요에 맨살이 닿으면 피부병이 생길 것 같아 나는 수형자복을 입은 채 담요 위에 몸을 눕혔다.

감옥 경험이 풍부한 ‘떠버리 수형자’가 졸지에 우리 방의 방장이 되었다. 싱크대에 등을 기대고 앉은 ‘떠버리 수형자’가 우리 방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20대 수형자에게 왜 감옥에 왔는지를 물었다.

“우리 형편에 어떻게 변호사를 구합니까?”

20대 수형자는 전문대학에서 미술을 전공하는 1학년 학생이었다. 죄목은 강간미수였다. 그는 말할 기회가 주어지자 마이크를 잡은 양 주절대기 시작했다.

지난 4월 3일 시민에게 공개된 옛 영등포교도소(서울 구로구 고척동) 독방 모습.

“술 한잔 마시고 성남에 있는 노래방에 갔습니다. 20대의 도우미가 우리 방에 들어왔어요. 춤추고 노래 부르고 신나게 놀았죠. 끝날 무렵쯤 도우미가 살랑살랑 꼬리를 치는 거예요.

웬 떡인가 싶어서 따라 나갔죠. 포장마차에서 한잔을 더 먹은 뒤 모텔에 가려고 했더니 도우미가 모텔비를 절약하자며 자기 집에 가자는 거예요. 도우미 혼자서 자취하는 원룸으로 따라갔습니다.”

나는 대학생 수형자의 경험담에 귀를 기울였다.

“애무를 하고 막 삽입을 하는 순간에 갑자기 여자가 ‘강도야’ 하면서 고함을 지르는 거예요. 여자가 가자고 해서 집에 따라갔는데 태도가 돌변한 겁니다. 겁이 나서 급히 바지를 입고 도망치려고 했죠.

그랬더니 그 여자가 내 허리춤을 꽉 잡고는 놓아 주지 않고 계속 고함을 지르는 거예요. 그 소리를 듣고 아랫집, 옆집에서 남자들이 달려오는 바람에 현장에서 체포되고 말았어요.”

‘떠버리 수형자’가 물었다. “사정은 했어?” “넣자마자 뺐으니까 사정할 틈도 없었지요.” “여자 애가 왜 그런 거야. 옷을 벗지 않는다고 두들겨 팬 것은 아니야?”

“영문을 모르겠어요. 경찰관 앞에서 진술할 때는 자기가 옷을 벗지 않는다고 하여 제가 폭행했다고 얼토당토않은 거짓말까지 했어요. 제가 여자를 때리지 않았다는 것은 검찰조사에서 사실인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그렇지만 구속되지 않으려면 그 여자와 합의를 해야 한다고 합디다.

여자가 합의금으로 1000만원을 요구하고 있어요. 우리 아버지는 하루 벌어 하루를 먹고 사는 건설현장 노가다고, 어머니는 식당 주방에서 알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형편에 1000만원을 어디서 구합니까? 합의가 안 되니까 구속되어 감옥에 온 겁니다.”

‘떠버리 수형자’가 혀를 끌끌 차면서 말했다. “꽃뱀한테 당한 거여. 도망가지 못하게 하려고 집으로 유인한 거지. 이 세상이 얼마나 험한데 여자가 자기 몸을 공짜로 주겠어? 사는 게 힘들다 보니 몸뚱아리 하나를 밑천으로 해서 먹고사는 여자가 요즘 참 많아. 세상물정을 모르니까 대학생인 네가 당한 거야.”

“내일 오전에 우리 어머니가 그 여자를 만나서 합의금 문제를 상의하기로 했어요. 피해자와 합의만 하면 바로 풀려날 수 있다고 하던데요.”

“합의가 되면 집행유예로 풀려날 수 있는 거야. 그러려면 재판이 빨리 끝나야 해. 오늘 구속되었으니까 빠르면 한 달, 늦어도 두 달 안에는 풀려날 수 있을 거야. 요즘 사법부가 성범죄에 한해서는 엄한 처벌을 내리니까 무슨 수를 쓰서라도 합의를 해야 해. 변호사는 있는 거야?”

“우리 형편에 어떻게 변호사를 구합니까?” “그렇다면 어머니에게 무조건 합의를 해야 된다는 점을 잘 말씀드려. 당신이 감방 문을 나가는 길은 그것 외엔 없어.” 성동구치소에서의 첫날 밤은 그렇게 흘러갔다.

신고식을 치르다

이튿날 점심식사가 끝나자 내가 본격적으로 감옥생활을 시작할 본방으로 이감될 시간이었다. 한 사람씩 불려 나가기 시작했다. 혈당 수치가 높게 나온 나는 요양동에 배치되었다.

성동구치소는 8동이 요양동이다. 8동에는 1층과 2층에 각각 16개의 감방이 있다. 감방에서는 1층은 하(下)로, 2층은 상(上)으로 표시한다. 내가 배치된 본방은 8동의 1층 7호방이다. 이는 ‘8下7’로 표시한다. ‘8下7’이 내 주소인 셈이다.

감방에 들어갈 준비를 마친 나는 세면용 비닐 백을 들고 교도관의 감시 속에 ‘8下7’ 방에 도착했다. 방 앞에 도착한 교도관이 가로 1cm, 세로 10cm 크기의 얇은 플라스틱으로 만든 명패를 출입문 왼쪽에 부착된 주소함에 넣었다. 내 이름과 생년월일, 죄명 등 세 가지 항목을 기록한 플라스틱 명패다.

내가 앞으로 10개월 동안 감옥생활을 해야 할 ‘8下7’ 방에는 4명의 수형자가 수용돼 있었다. 크기는 신입 방과 같은 2.2평. 60이 넘은 할아버지 수형자가 밥상앞에 앉아서 편지지에 한자(漢字)를 쓰고 있었고,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세 명의 수형자가 마치 잡아먹을 듯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한 명은 일본 스모 선수처럼 100kg이 넘는 비대한 체구에 뱃살이 출렁거렸고, 또 한 명은 80kg가량의 딴딴한 체구에 빈틈이 없는 야무진 인상이었다. 또 다른 한 명은 장발에 미남형인데 깐깐하게 생겼다.

감방에서 처음 맞이하는 운명의 신고식 시간이다. 이걸 잘 통과해야 감방생활이 편하다는 것을 나는 이미 알고 왔다. “처음 뵙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선 채로 가볍게 목례를 한 나는 출입문 앞에 섰다.

할아버지 수형자는 내 인사에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나머지 수형자들은 “어서 오세요” 하면서 앉으라고 했다. 나는 화장실 앞의 비어 있는 자리에 엉덩이를 걸쳤다. 나는 벽에 기대고 앉아 입을 꽉 다물었다.

험악한 수형자들을 만난 첫 자리에서 말을 많이 하면 실수를 할 수 있고 자칫하면 꼬투리를 잡힐 수 있다. 기싸움에서 이기려면 말은 가급적 짧게, 적게 하고 침묵해야 한다. 수형자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내 행동을 지켜볼 뿐이었다.

내가 입을 다물고 가만히 앉아 있자 야무진 인상의 수형자가 먼저 말을 걸었다. “커피 마시겠어요?” 그는 이 방의 부방장이었다. “한 잔 주면 고맙게 마시겠다”고 하자 그는 “크림을 뺀 커피가 있고, 설탕과 크림을 다 넣은 커피가 있어요. 어느 걸 선택하겠어요?”라고 다시 물었다.

나는 조직폭력배들이 다방에서 거들먹거리며 폼 잡을 때 외치는 다방커피를 주문했다. 커피와 크림, 설탕이 다 들어가는 게 다방커피다. 세상물정에 어두운 샌님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일부러 “다방커피”라고 힘주어 말했다. 부방장은 내 주문의 의미를 알고 있었다.

방장(房長)과 부방장(副房長) 법정구속되고 4일 만에 처음 마시는 커피는 달콤하면서도 향긋했다. 나는 천천히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방안을 둘러보았다.

TV 위에는 개인 사물함과 수형자들이 공동으로 사용하는 공용함이 있고, 그 반대편 벽에는 옷걸이가 있었다. 공용함에는 커피, 빵, 사과, 천도복숭아, 참외, 컵라면, 우유, 두유, 초코파이, 사이다, 콜라, 포카리스웨트, 감자칩, 양파칩 등이 가득했다.

신입 방과는 완전히 다른 부자 방이라는 냄새가 물씬 났다. 침묵의 시간이 계속되었다. 내 이름이 무엇인지, 내 죄목이 무엇인지를 물어보는 수형자는 없었다. 그때 깐깐한 인상의 미남형 수형자가 나에게 물었다. “대학은 어디를 나왔습니까?”

예상치 못한 질문이었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대학을 밝히는 게 좋을지, 밝히지 않는 게 좋을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군에서의 아픈 기억 때문이다. 논산훈련소에서 신병훈련을 마치고 자대에 배치된 첫날, 나는 자랑스럽게 대학 이름을 밝혔다가 고졸 출신의 고참병들로부터 5파운드짜리 곡괭이 자루로 20대를 맞은 적이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든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게 내 신조다. 나는 대학 이름을 밝혔다. 서울에서는 꽤 이름이 알려져 있는 대학이다. 그러자 그 수형자가 “저도 그 대학을 나왔습니다. 저는 87학번이니까 저보다 선배님이 되시겠군요” 하면서 반색했다.

하지만 이 때문에 적(敵)도 생겼다. 부방장은 대학 출신에 대해 적개심이 강한 중졸 출신이고, 방장은 고교 졸업 후 곧바로 미국의 이름 없는 대학으로 유학 간 유학생 출신인데, 감옥에 오기 전에 다녔던 직장에서 스카이(SKY) 대학 출신들로부터 서러움을 많이 받은 사람이었다. 대학 시절의 이야기로 인해 나에 대한 방장과 부방장의 첫인상은 썩 호의적이지 않았다.

방장은 키는 나와 비슷했으나 체중이 100kg에 육박하는 거구였다. 샤워하고 벌거벗은 몸으로 나올 때 보니까 근육질이 아니고 비만형이다. 미국 유학 시절에 엄청나게 먹은 패스트푸드로 인한 비만 같았다. 덩치만 컸지 싸움 기술은 없는 듯했다.

문제는 부방장이었다. 그는 나와 키가 비슷하나 체중 80kg의 거구인데, 허벅지와 종아리 살이 마치 바위처럼 딴딴했다. 중학교 다닐 때 폭력을 휘둘러 소년원 생활을 했다는 부방장은 조직폭력배 세계에 밝은 건달 출신이다. 한가락 한 부방장과 1대1로 맞붙으면 내가 이길 확률이 적어 보였다.

감방 안의 쓰레기 분리수거 성동구치소 요양동의 하루는 오전 6시에 시작되었다. 이불을 개고 방 청소가 끝날 무렵 교도관이 방마다 약을 넣어 주었다. 비닐로 포장된 약봉지 겉면엔 수형자 번호가 쓰여 있었다. 나와 방장과 대학 후배는 당뇨 약을 받았다. 부방장과 어르신에게는 고혈압 약이 나왔다.

오전 6시30분에 인원점검이 있었다. 요양동 1층 담당 교도관과 그보다 계급이 높은 보안계장 등 두 명이 각 방을 돌며 쇠창살에 고개를 들이밀고는 인원을 확인했다.

점검이 끝나자 부방장이 공용함에서 우유를 꺼내 마셨다. 방장은 두유를 먹었다. 졸병인 나는 멀뚱히 쳐다만 보았다. 대학 후배가 나를 보고 “우유와 두유 중 어느 것을 먹겠느냐”고 물어 나는 두유를 선택했다. 감방 안에는 냉장고가 없지만 감방에서 먹는 우유와 두유는 상온에서 6개월간 장기 보관이 가능한 제품이다.

점검이 끝나자 수형자복을 벗은 어르신이 팬티만 걸친 채 수건과 세탁물을 들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화장실 청소를 하기 위해서였다. 화장실이 불결하면 고약한 냄새 때문에 감방생활이 피곤하다. 화장실의 악취를 없애기 위하여 감방에서는 치약과 비누로 변기와 그 주변을 닦는다. 우리 방 화장실 청소는 어르신이 전담했다.

대신 어르신은 방 청소나 설거지 같은 잡일은 일절 하지 않았다. 화장실 청소를 마친 어르신은 샤워를 한 다음에 자기가 입었던 팬티와 러닝셔츠, 그리고 우리 방 걸레들을 말끔하게 빤 뒤 화장실 밖에 내놓았다.

그러자 대학 후배가 이를 빨래걸이에 널고 빨래집게로 집었다. 비위가 약한 나는 물 묻은 남의 속옷에 손대는 것을 체질적으로 싫어한다. 고참들이 하는 일을 거들지 않고 멀뚱히 바라보고 있는 나를 방장이 못마땅한 눈초리로 쳐다보았다.

방장이 헛기침을 했다. 앞으로 조심하라는 무언의 경고다. 그러거나 말거나 하기 싫은 일은 죽어도 하지 않는 게 내 성격이다. 나도 헛기침을 하며 대항했다.

방 안의 어색한 공기를 대학 후배가 눈치를 챘다. “이 방의 두 번째 연장자인 선배님이 샤워할 차례입니다.” 어색한 분위기를 탈피하기 위해 나는 못 이기는 척하며 화장실에 들어갔다. 하지만 화장실에 오래 있다가는 또 다시 찍힐 것 같아 이빨만 대충 닦고 얼른 나왔다.

감방 안에서도 쓰레기는 분리수거했다. 방마다 종이박스로 만든 쓰레기통이 두 개씩 있다. 쓰레기통마다 그 가운데를 분리해 한쪽에는 휴지 등 일반 쓰레기를, 다른 쪽에는 김 포장용 팩이나 스낵 포장지 등 비닐류를 넣었다.

우유팩이나 페트병 등 재활용 쓰레기와 신문지는 분리해서 다른 쓰레기통에 담았다. 인원점검이 끝나면 감방 도우미가 이 4종류의 쓰레기를 대형 마대자루 4개에 따로따로 담아 갔다.

그 다음은 뜨거운 물 배식이다. 막걸리 한 말을 넣을 수 있는 크기의 플라스틱 용기에 펄펄 끓는 뜨거운 물을 담아 방마다 넣어 준다. 맨손으로 들기엔 버거울 정도로 물이 뜨겁다.

이 물통에 보리차 팩 3개를 넣어 두 시간쯤 우린다. 우러난 보리찻물을 수형자들에게 배분하는 일은 방장의 몫이다. 수형자들은 이 물을 각자의 페트병에 담아 식수로 사용했다. 이런 뜨거운 물이 하루에 세 번 공급되고, 원하면 더 준다.

겨울철엔 이 물로 식기를 닦는다. 배식은 오전 7시20분부터 시작되었다. 교도관 한 명과 감방 도우미 두 명이 밥과 국, 반찬이 실린 밥 차를 끌고 다니며 1번 방부터 16번 방까지 골고루 나눠 주었다.

밥은 원하는 만큼 퍼 주었다. 맛있는 반찬은 양이 한정돼 있기 때문에 반찬 배식을 담당하는 감방 도우미에게 잘보여야 더 얻을 수 있다.

밥상 앞에 둘러앉아 식사를 기다리고 있는데, 방장이 드디어 나를 겨냥하여 쓴소리를 했다. “내가 감옥생활을 처음 시작할 때는 선배들의 잠을 깨우지 않기 위해서 밤에는 아예 화장실 출입을 못했어요. 어젯밤에 보니 화장실 출입이 잦데요. 저녁식사 후엔 가급적 물을 적게 마시고 화장실 출입을 삼가세요. 그리고 당뇨 환자는 오줌에서 악취가 납니다. 오줌을 눌 때는 반드시 물을 세게 틀어 놓고 볼일을 보세요.”

화요일 아침 메뉴는 순두부국과 햄야채조림, 배추김치였다. 점심과 저녁엔 반찬 수가 세 가지지만, 아침에는 반찬이 두 가지다. 대학 후배는 햄야채조림을 한 사발 더 받았다. 맵지도 짜지도 않은 순두부국에는 순두부가 가득했고, 햄도 다섯 명이 먹을 수 있을 만큼 양이 풍성했다. 여기에 멸치와 김까지 있으니 아침 밥상으론 더할 나위가 없었다.

식사가 끝난 후엔 희망자에 한해서 커피를 마셨다. 나는 설거지를 자청했다. “당뇨병 환자는 식사 후에 운동을 해야 합니다. 내 몸을 위한 운동 차원에서 설거지를 하는 것이니까 하루 세 번의 설거지는 나에게 맡겨 주세요. 지금부터 설거지는 내가 전담하겠습니다.”

내가 자청해서 설거지를 하겠다고 하자 아무도 반대하지 않았다. 모두 흐뭇해하는 기색이다. 아침식사가 끝난 오전 8시부터 하루 일과가 시작되는 오전 9시까지 한 시간 동안은 방 안에서 누울 수 있는 자유시간이다.

이 한 시간 동안 방장과 어르신은 밀린 잠을 보충했고 부방장은 몸을 가볍게 푸는 운동을 했다. 대학 후배는 성경책을 읽었다. 나는 이 한 시간을 이용해 샤워를 하고 사흘 동안 입고 있었던 팬티와 러닝셔츠를 빨았다. 햇볕이 잘 드는 곳에는 고참들의 빨래가 널려 있어서 나는 맨 구석에 내 빨래를 널었다.

스킨과 로션, 전기면도기를 사다 하루 일과가 시작되는 오전 9시에 다시 한 번 인원점검이 실시됐다. 잠에서 깨어난 방장은 인원점검이 끝나자 밥상을 펼쳐 놓고 물품 구입서 작성에 들어갔다.

방장은 나에게 성동구치소에서 구입이 가능한 물품 리스트를 보여 주고는 필요한 물품이 있으면 말하라고 했다. 대학 후배가 옆에서 거들었다.

“선배님, 한꺼번에 다 구매하지 마시고 필요한 것부터 차근차근 구입하세요. 꼭 필요한 물품들을 제가 권해 드리겠습니다. 팬티 두 장, 러닝셔츠 두 장, 수건 두 장은 필수품입니다. 비누와 치약, 빨랫비누는 국가에서 무상으로 제공하므로 신청할 필요가 없고, 칫솔과 면도기가 있어야 합니다. 물건값이 면세 수준이므로 스킨과 로션도 개인적으로 갖고 있는 게 좋습니다. 운동할 때 신는 운동화와 반바지, 반팔 티셔츠는 생활해 가면서 필요하면 신청하세요. 그리고 이것들을 보관할 가방이 필요합니다.”

나는 대학 후배가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것들보다 나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항소이유서를 쓸 종이와 볼펜이었다. 민사사건은 선고가 끝나고 판결문을 송달 받은 후 2주일 안에 항소를 하면 되지만, 형사 사건은 판결문 송달이라는 게 없다. 선고가 있은 지 1주일 안에 서면으로 항소 의사를 밝혀야 2심을 받을 수 있다. 이 1주일을 넘기면 형이 확정된다.

때문에 수형자들은 항소이유서 제출 만료 기간을 넘길까 봐 굉장히 몸 달아한다. 방장은 내 물품 구입서에 항소이유서 양식과 볼펜을 추가했다. 이를 지켜보던 부방장이 나를 보며 한소리를 했다.

“어젯밤에 방귀를 뀌는데 냄새가 고약합디다. 장(腸)이 나쁜 것 같아요. 장에 낀 숙변을 제거하는 약도 구매가 가능합니다. 건강을 생각해서 종합비타민도 구입하세요.”

그래서 물품 리스트를 자세히 보니 먹는 약에서부터 바르는 연고까지 구입 가능한 약 종류가 무궁무진했다. 종합비타민도 있었다. 운동화와 운동용 반팔 셔츠는 유명 브랜드 제품이다. 돈만 있으면 감옥에서도 종합영양제를 먹으며 폼 나게 행세할 수 있었다.

내 개인 물품 구매서 작성이 끝나자 방장은 방에서 사용할 공용 물품 구매서 작성에 착수했다. 구매서를 제출하고 이틀 후에 물품이 들어오기 때문에 매일 이틀치 물건을 청구하는 게 관행이다.

오늘 청구할 물품은 1인당 우유 여섯 개와 두유 여섯 개, 김 열 통, 멸치 열 통, 한 통에 다섯 개가 들어 있는 프랭크소시지 다섯 통, 빵 열다섯 개, 사과 다섯 봉지, 천도복숭아 다섯 봉지, 땅콩강정 열 개, 양파칩 열 개, 감자칩 열 개, 초코파이 두 상자다. 이를 5명의 수형자가 나눠 부담했다.

물품 대금은 영치금에서 자동으로 빠져나간다. 수형자 한 명이 하루에 우유나 두유 세 개를 마시고, 주전부리를 하고, 과일을 먹고, 김과 멸치 등의 구입에 사용하는 돈은 1만원 안팎이다. 한 달이면 20만원가량이 필요하다.

돈의 위력은 일반 사회나 감방이 다르지 않았다. 오전 10시는 운동시간이다. 요양동 1층의 16개 감방 가운데 1방에서부터 8방이 먼저 30분간 운동하고, 9방부터 16방은 오전 10시30분부터 운동했다. 운동장이 비좁기 때문에 나눠서 운동을 했다.

운동시간이 되면 굳게 잠긴 감방 문이 활짝 열린다. 감방 옆에 위치한 운동장에 나온 수형자는 약 40명이었다. 한 방에 5명씩, 모두 8개 방에 수용된 수형자들이다.

운동을 하기 싫은 수형자는 방에서 나오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방 안에 혼자 있으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기 때문에 그럴 때는 동료 수형자 한 명이 감시인 격으로 남아 있어야 한다.

운동장에서 하얀 고무신에 고동색 수형자복을 입은 사람은 나 혼자뿐이었다. 다른 수형자들은 유명 브랜드 운동화에 로고가 새겨진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티셔츠가 없는 수형자는 러닝셔츠 차림이다. 아래위 모두 수형자복을 입은 나는 한눈에 신입 수형자 티가 났다. 한 마리의 고독한 늑대가 된 기분이었다. 나는 수형자복을 단정히 입은 채 묵상하며 걸었다.

[- 더 자세한 내용은 월간조선 6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