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은 놀랍도록 명랑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네. 나무 한 그루, 산 울타리 한 가지마저 꽃다발이 아닌 적 없다네.” 독일 소설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속 5월의 일기를 읽어나가던 DJ가 말했다. “오늘 제 기분이 딱 이렇습니다. 저 33년 만에 앉은 거예요, 여기.”
KBS2라디오 '밤을 잊은 그대에게'(수도권 106.1㎒)가 탄생 반백년을 맞았다. 특집 방송을 맞아 7일 특별 DJ를 맡은 황인용(74)도 머리가 반백이 다 돼 있었다. 밤 10시, 50년째 시그널 송인 '시바의 여왕'에 맞춰 "밤을 잊은 그대에게"를 발음할 땐 목소리 끝이 흔들렸다. 운전하며 오는 내내 억양까지 연습했던 문구다. 라디오 부스 밖에서 신혜원 작가가 웃으며 말했다. "떨리시나봐." 오프닝 인사말은 예정 시간을 두 배 넘겨 4분가량 이어졌다.
'밤을…'은 라디오와 TV를 통틀어 현존하는 최고령 프로그램이다. 1964년 5월 9일 RSB(라디오서울)에서 처음 방송한 이래 TBC를 거쳐 1980년 언론 통폐합 당시 KBS에 흡수돼 오늘에 이른다. 초대 DJ 이성화 아나운서 이후 송승환·박중훈·신애라 등 25명의 쟁쟁한 스타가 거쳐 갔다. 이상묵 PD는 "라디오의 전성기였던 1970~80년대 '밤을…'은 곧 황인용이었다. 목소리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말했다.
이날 선곡은 황씨가 맡았다. 첫 곡은 잭슨 브라운의 '러닝 온 엠티(Running on empty)'. "제목 멋지죠. 허무에의 질주. 33년 세월이 대체 어디 간 거야 이거. 라디오 들으시는 분들, 제 33년 좀 돌려주세요." 황씨가 농을 할 때마다 부스 밖 제작진도 폭소를 터뜨렸다. 시청자 게시판은 옛 추억에 잠긴 800여명의 청취자들로 넘쳤다.
현직 DJ인 가수 임지훈(55)은 이날 기꺼이 황씨의 게스트가 돼줬다. 임씨는 "옛 청취자로서 꿈에 그리던 황인용 선배와 함께 방송을 하고 있다는 게 믿을 수 없는 추억"이라고 말했다.
'오리지널사운드트랙'을 음악가 이름으로 착각하던 '초짜' DJ 시절 황씨는 긴장을 잊으려 여성 청취자가 보내준 사진을 마이크 위에 붙여놓고 대화하듯 얘기한 적이 있다. 황씨가 임씨에게 '긴 머리 소녀'의 라이브 노래를 청했다. "이 노래에 제 청춘이 다 묻어 있다"는 황씨에게 임씨가 기타 줄을 퉁기며 말했다. "그때 긴 머리 소녀는 나이 좀 드셨겠는데요?" 방송 중간에 1978년 7월 30일 충남 연포해수욕장에서 연 '해변가요제' 녹음분이 흘러나왔다. 본인의 예전 목소리를 듣던 황씨가 입을 열었다. "왜 그땐 내가 잘생겼다는 것도 모르고 청춘을 그리 보냈을까. 왜 고민만 많았을까. 지금 청춘을 보내고 있는 분들, 지금이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간입니다."
50주년 특집 방송은 10일까지 이어진다. 50주년 기념 앨범도 제작되고, 7월엔 콘서트도 연다. “현실을 위로해주는 건 추억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정, 작별 인사를 마친 황씨가 말했다. “아! 미치겠다. 오늘은 도저히 그냥 집에 못 가겠네.” 근처 포장마차에 갔다. 밤을 잊고 잔을 비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