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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호기(征虎記)|야마모토 다다사부로 지음|이은옥 옮김|에이도스|213쪽|2만원

백운학은 함경남북도에 걸쳐 있는 남운령에서 20일 오후 4시 눈에 찍힌 호랑이 발자국을 발견했다. 사냥꾼 3명과 산 정상에 진을 쳤다. 몰이꾼 10명이 밑에서 고함을 지르고 돌을 던지기 시작했다. 산허리에서 호랑이 한 마리가 산꼭대기로 질주했다. 백운학은 호랑이와 약 40걸음 떨어진 거리에서 첫 탄을 등에, 두 번째 탄을 복부에, 세 번째 탄을 경부에 맞히어 쓰러뜨렸다.

일본 사업가 야마모토 다다사부로(山本唯三郞)가 쓴 '정호기(征虎記)'에는 한국 호랑이 사냥이 기록돼 있다. 그는 1917년 11월 조선에 들어와 원산·북청 등지에서 호랑이와 표범을 사냥했고, 백운학은 그가 고용한 포수 중 한 명이었다. 광복 이후 남한에서는 호랑이가 포획된 적이 없다. 사실상 멸종이다. 이 책은 호랑이 절멸이라는 사건이 일어나기 전 어떤 일이 있었는지 보여주는 '블랙박스'인 셈이다.

호랑이에 대한 경외심

청동기 시대에 그려진 울주군 반구대 암각화, 고구려 고분 벽화의 사신도를 비롯해 민화와 장식품, 석상 등에 호랑이가 묘사돼 있다. 한국인은 호랑이와 더불어 살아왔고 이 맹수를 공경하면서 두려워했다. 그 경외심은 호랑이 가죽을 깔고 앉거나 그림이라도 집에 두면 기운을 얻을 수 있다는 믿음을 낳았다. 호랑이 고기나 뼈를 먹으면 병을 물리칠 수 있다고 여겼다. 최남선이 '호담국(虎談國)'이라 부를 만큼, 호랑이 이야기나 속담이 널려 있다. 88올림픽 마스코트도 호돌이였다.

일본에는 호랑이가 없었다. 호랑이 사냥은 하나의 로망이었고 용맹함을 뽐낼 드문 기회였다. 임진왜란 때 함경도 방면으로 출병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는 조선 호랑이를 사냥했다. 야마모토도 자신의 자본과 제국주의 일본의 지배력을 과시하려는 목적으로 호랑이 사냥 과정을 '정호기'에 기록했다. 그럼에도 사진 97점과 글로 담은 호랑이와 표범 서식 상황, 객관적 통계, 사냥에 대한 서술 등은 귀한 자료라는 평이다.

조선 호랑이 사냥

야마모토는 1917년 11월 10일 도쿄에서 출발해 부산·경성을 거치며 사냥꾼 24명(조선인 21명)과 기자 19명을 불러모았다. 사냥팀을 8개 반으로 나눠 함경남북도, 강원도 금강산, 전라남도에서 조직적으로 사냥을 벌였다. 구경이 작은 단발 엽총을 썼고, 야마모토는 함경남북도에서 사냥을 지휘했다.

사흘 만에 제3반의 백운학이 2.1m 길이의 암호랑이를 잡았다. 제1반의 최순원도 총탄에 맞고 굴로 숨은 호랑이를 쓰러뜨렸다. 호랑이 100마리를 잡았다는 강용근은 뜻밖에 빈손으로 돌아왔다. 야마모토는 포수들의 무용담을 듣고 은잔에 술을 가득 따라 건넸다. 20일 만에 경성으로 돌아왔는데 호랑이 두 마리, 표범 한 마리, 수호(水虎·호랑이와 표범의 혼혈) 한 마리, 곰 한 마리 등 포획물이 기차 한 칸을 가득 채웠다.

야마모토 다다사부로(사진·가운데 콧수염 기른 남자)가 이끄는 호랑이 사냥에 참여했던 포수들이 포획한 호랑이 두 마리와 함께 1917년 11월 함경북도 신창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야마모토는 그해 12월 20일 도쿄 제국호텔에서 '호랑이 고기 시식회'를 열었다. "최원순이 잡은 호랑이를 옮겨왔습니다. 전국시대(15~16세기 일본) 무장은 진중의 사기를 높이려고 조선 호랑이를 사냥했지만 저희는 일본의 영토 내에서 호랑이를 잡았습니다." 그는 쉰넷의 나이에 숨졌다. 시식회를 연 지 10년 만이었다.

한반도 호랑이 복원 가능성은?

조선총독부 잡지 '조선휘보(朝鮮彙報)'에 따르면 1915~1916년 호랑이·표범 같은 맹수의 공격으로 사상자 351명이 발생했고 가축 피해도 1만3830마리에 달했다. 엔도 기미오가 쓴 '한국 호랑이는 왜 사라졌는가'(이담북스)는 호랑이 급감 원인으로 일제강점기 '해수구제(害獸驅除)' 정책을 꼽았다. 조선에도 포호(捕虎)정책이 있었고 6·25와 급속한 개발이 뒤따랐기 때문에, 호랑이 멸절을 일제만의 책임으로 돌릴 수는 없다. 감정적이지 않은 학술적 접근이 필요하다.

야마모토는 호랑이를 박제와 골격 표본으로 만들어 모교(도시샤 고등학교)에 기증했다. '조선산(朝鮮産)'으로 표시된 표본 2점은 '내가 왜 이곳에 있어야 하는가' 묻는 것 같다. OECD 국가 중 한국에만 자연사박물관이 없다. 이항 서울대 수의과대학 교수는 "호랑이 유전체 DNA를 분석한 결과 한국 호랑이는 시베리아 호랑이와 같은 계통"이라며 "연해주에 있는 시베리아 호랑이의 서식 환경을 보호해주면 백두산을 통해 한반도에도 호랑이가 돌아올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