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재준 국가정보원장이 15일 중국 화교 유우성씨에 대한 간첩 혐의 증거 조작 사건과 관련해 "환골탈태할 기회를 달라"며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한 것은 자신에 대한 야권(野圈)의 사퇴 요구를 사실상 거부한 것으로 해석된다. 박근혜 대통령은 같은 시각 국무회의를 주재하면서 남 원장의 유임(留任)을 전제로 "국민께 심려를 끼쳐 드리게 되어 송구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 대통령이 직접 사과를 하면서까지 남 원장을 유임시킨 것이다. 하지만 남 원장이 국정원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회복할 만한 리더십을 발휘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南원장 사의 표명… 청와대 만류"
남 원장은 당초 이번 사건이 불거지자 자신의 거취를 고민했고 청와대에도 그만두겠다는 뜻을 밝힌 것으로 알려졌다. 남 원장은 노무현 정부 시절 육군참모총장으로 일할 때도 청와대 386 인사들과 군 인사 문제로 갈등이 빚어지자 사표를 제출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은 이를 반려했다.
박 대통령도 남 원장의 사의 표명에 대해 "현재 안보 상황이 엄중하므로 가볍게 움직여서는 안 된다"며 "업무를 계속 챙겨달라"고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자 남 원장은 우선 증거 조작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 결과가 발표될 때까지 사태 수습을 책임지겠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남 원장은 당초 간첩 증거 조작 논란이 불거졌을 때 국정원 직원들에게 "대공 수사 라인이 억울한 점도 많고 할 말도 많겠지만 국가기관인 검찰과 국정원이 충돌하는 모습은 바람직하지 않다"며 검찰 수사에 협조를 지시했었다. 청와대는 이후 검찰의 수사 결과를 기다려보자는 입장을 취했다. 박 대통령은 지난달 수석비서관회의에서 "검찰은 한 점 의혹도 남기지 않도록 수사하고, 문제가 드러나면 반드시 바로잡겠다"고 했다.
검찰은 그러나 남 원장 등 국정원 지휘부의 증거 조작 개입 여부는 밝혀내지 못했다. 청와대는 국내·외 방첩(防諜) 업무를 총괄하고 있는 서천호 제2차장을 물러나게 하는 선에서 사태를 마무리했다. 이번 사건이 남 원장을 경질할 정도의 사안은 아니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한반도 정세가 엄중한 시기에 정보 당국의 수장을 교체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와 '통일 대박' 등 현 정부의 대북 어젠다의 기획 및 실행에 남 원장이 깊이 관여해온 점 등이 고려됐다고 한다.
◇국정원 개혁이 관건
남 원장은 취임 이후 NLL 대화록 공개, 국정원 선거 개입 사건 등 수차례 고비를 넘긴 데 이어 이번에도 박 대통령의 '신뢰'를 바탕으로 자리를 지키게 됐다.
그러나 이번 증거 조작 사건은 국정원 본연의 임무인 간첩 수사와 관련됐다는 점에서 적잖은 상처가 될 것으로 보인다. 남 원장은 국정원 개혁을 통해 잃어버린 국민의 신뢰를 되찾겠다고 했지만 그의 앞날은 불투명하다. 남 원장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낡은 수사 관행과 절차의 혁신을 위해 TF를 구성해서 강도 높은 쇄신책을 마련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국정원 내부에선 "지금도 간첩 사건을 수사하려면 수년간에 걸친 은밀한 추적이 필요한데 절차적 투명성만 지나치게 강조하다가는 대공 방첩망이 뚫릴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남 원장이 간첩 수사 관행 및 절차의 혁신을 강조하면서 한편으론 "대공 수사력을 한층 강화하겠다"고 한 것도 이율배반이라는 지적이다. 남 원장은 대공 수사력 강화 수단으로 '과학 수사'를 언급했다. 그러나 이를 위해 필수적이라고 국정원이 주장해온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은 국회 통과가 요원한 상태다. 남 원장은 내·외부적 환경이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은 상황에서 마지막 시험대에 서게 됐다.
박 대통령은 이날 "(국정원이) 또다시 국민의 신뢰를 잃게 되는 일이 있다면 반드시 강력하게 책임을 물을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