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소비자 물가 상승률이 4년 4개월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유럽중앙은행(ECB)이 디플레이션(물가하락) 대응에 나설 가능성이 커졌다.
31일 유럽 통계청인 유로스타트에 따르면, 지난 3월 유로존(유로화 사용 18개국) 소비자 물가 상승률(예비치)은 전년대비 0.5% 상승하는 데 그쳤다. 이는 2009년 11월(0.5%) 이후 가장 낮은 수준으로, 블룸버그가 전문가를 대상으로 벌인 설문조사의 평균 예상치(0.6%)보다 낮은 것으로 집계됐다.
항목별로 살펴보면, 식료품(1%), 산업재(0.3%), 서비스(1.1%) 등의 가격이 올랐지만, 에너지 가격이 전년대비 2.1% 하락했다. 식료품이나 원유 등 가격 변동이 심한 품목을 제외한 근원 물가 상승률은 0.8%를 기록 전달의 1%보다 0.2%포인트 낮아졌다. 중앙은행 관리 목표인 2%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
유럽의 소비자 물가 상승률은 6개월 연속 0%대에 머무르고 있다. 지난해 10월 0.7%로 떨어진 이후 지난해 11월 0.9%로 소폭 올랐지만, 지난해 12월 0.8%로 다시 떨어졌다. 올해 1월과 2월에는 각각 0.8%, 0.7%를 기록했다.
◆ “금리는 동결하겠지만, 추가 부양 가능성 있어”
상당수 전문가들은 ECB가 내달 4일 열리는 정례 통화정책회의에서 추가 부양책을 발표할 가능성이 있다고 전망했다.
리처드 맥기어 라보뱅크 연구원은 파이낸셜타임스(FT)에 “이미 투자자들은 ECB가 양적완화에 나설 것으로 예상하고 투자 전략을 짜기 시작했다”며 “ECB는 구두개입으로 투자자들을 설득하려 하겠지만, 결국 비전통적인 정책을 사용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ING도 “ECB가 정례 통화정책회의에서 기준금리를 동결할 가능성이 크다”며 “하지만 선제안내(forward guidace)나 새로운 유동성 공급 조치를 발표할 가능성도 있다”고 밝혔다.
ECB의 추가 대응책으로는 ▲ECB 예치금(시중은행이 중앙은행에 예치하는 돈) 마이너스 금리 적용 ▲채권 불태화(채권 매입액과 같은 양의 유동성을 흡수하는 것) ▲기업·가계 대출 패키지 인수 등이 거론된다.
하지만 ECB가 2분기부터 물가 상승률이 상승 추세로 돌아설 것이라는 전망하고 있기 때문에 추가 대응에 나서지 않을 것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크리스 시클루나 다이와증권 이코노미스트는 블룸버그에 "3월 물가 상승률 수치는 ECB에게 분명히 도전을 안겨줬지만 ECB는 4월부터 물가 상승률이 오를 것으로 보고 있다"며 "단순히 3월 물가 상승률이 낮게 나왔다고 행동에 나선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블룸버그에 말했다.
◆ 유럽경제 디플레 조짐…ECB "디플레이션 발생 위험 제한적"
최근 유럽의 주요 금융당국 인사들은 저물가 위험에서 벗어나기 위해 ECB가 추가 부양에 나설 수 있다는 발언을 잇달아 쏟아냈다.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는 지난 25일(현지시각)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연설에서 “디플레이션 발생 위험이 제한적이긴 하지만, 물가하락이 발생할 경우 추가적인 통화 완화 정책을 취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ECB 내 가장 강력한 강경파로 분류되는 옌스 바이트만 독일 분데스방크 총재도 “자산 매입이 터무니없지는 않다”며 “경기 부양 정책들이 실제로 효과가 있을지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유럽 경제가 디플레이션에 빠질 가능성은 거의 없다는 게 ECB의 일관된 입장이다. 하지만 일부 전문가들은 ECB가 아무런 행동을 취하지 않고 있는 가운데, 유럽 경제가 디플레이션 조짐을 보이고 있다고 경고했다.
필립 발레린 바클레이스 수석 연구위원은 “ECB는 최근의 저물가 현상이 기저효과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지난해 여름부터 물가 상승률이 계속 떨어지고 있다”며 “유럽 경제가 디플레이션에 빠질 가능성이 점점 더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이날 발표된 3월 물가 상승률은 속보치로, 확정치는 다음 달 16일 발표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