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봉식(2014년), 김수진(2013년), 정아율(2012년)…. 이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우봉식(44), 김수진(38), 정아율(25) 세 사람은 최근 생활고를 견디지 못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한 이들이다. 이들의 직업은 배우였다. 그러나 이들은 '단역배우'였다.

지난 3월 7일 월세방에서 숨진 채 발견된 우봉식은 죽음으로써 '대조영'에 팔보 역으로 나온 배우라는 사실을 세상에 알렸다. 그러나 영화·방송 관계자를 제외하고는 여전히 우봉식의 얼굴을 연상해내지 못한다.

'대조영'을 열심히 본 사람만이 "아, 이 사람이 우봉식이었어?"라는 반응을 보일 뿐. 2007년 인기를 끌었던 KBS대하드라마 '대조영'에서 일반 시청자는 주인공을 맡은 최수종과 주연급 조연인 이덕화, 정보석, 박예진 등 10여명만을 기억한다.

우봉식은 나름대로 연기자로서 성공하기 위한 코스를 밟았다. 안양예술고를 나와 1983년 MBC 드라마 '3840 유격대'로 데뷔했다. 30년 동안 4편의 영화와 1편의 드라마에 출연했다. 그가 단역으로 출연한 영화를 보자. '사이렌'(2000년), '플라스틱 트리'(2003년), '6월의 일기'(2005년), '사랑하니까, 괜찮아'(2006년).

이렇게 보면 대중이 배우 우봉식을 기억하지 못하는 게 어쩌면 당연하다. 우연이겠지만 그가 출연한 영화들은 이렇다 할 만한 화제를 일으키지 못한 채 흥행에 실패했다. 그가 그런 영화만을 일부러 찾아 출연했을 리는 없겠지만 운이 따르지 않았다. 주연배우도 기억하지 못하는 판에 단역배우로 나온 그를 누가 기억할까.

우봉식은 2007년 '대조영' 이후 출연작이 없었다. 얼마 안 되는 출연료조차 손에 쥐어본 지가 오래됐다. 배우 우봉식은 생활비를 벌기 위해 인테리어 공사 현장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일했다. 그는 남몰래 우울증으로 신경정신과 치료를 받기도 했다. 그의 죽음은 화려한 연예계의 이면(裏面)을 또 한 번 조명했다.

대중은 반짝반짝 빛나는 스타만을 바라본다. 별이라는 항성 뒤에 가려진 칠흑의 어둠은 보지 못한다. 영화계에 데뷔하면 금방 스타가 될 수 있다는 환상을 품는다. 현실은 아득하다. 스타와 단역배우들의 대우는 하늘과 땅의 차이다. 이건 할리우드 역시 마찬가지다.

현재 영화계에 제작자와 감독이 러브콜을 보내는 스타를 보자. 송강호·이병헌·하정우·김윤석이 특A급으로 분류된다. 류승룡·설경구·장동건·원빈·유아인·이제훈·이정재·조인성·정우성·최민식·현빈·황정민 등이 A급 주연배우로 분류된다. A급 여자배우로는 김하늘·김혜수·문소리·엄정화·이미연·임수정·수애·손예진·전도연·전지현·하지원이다. A급 배우 중에서 남녀를 구분한 까닭은 여자배우들이 남자배우들보다 상대적으로 출연료가 적기 때문이다.

특A급인 송강호·이병헌·하정우·김윤석 등의 영화 출연료는 7억~8억원 정도. 알려진 얘기지만 특A급들은 계약서 작성 때 인센티브 조항을 집어넣는다. 흥행이 성공할 경우에 흥행수입의 몇 %를 추가로 배당받는다는 식이다. 예컨대 영화가 1000만 관객이 들면 인센티브 조항에 따라 출연료보다 훨씬 많은 돈을 가져간다. A급 남자배우들은 5억~6억5000만원을 받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에서 언급한 A급 여자배우들의 개런티는 4억~6억원 정도로 알려져 있다.

현재 영화판에는 각광받는 조연들이 있다. 이른바 '신 스틸러(scene stealer)'로 불리는 조연들이다. 고창석·곽도원·김정태·마동석·성동일·유해진·정진영·조성하…. 이들 인기 조연배우는 한 편당 1억5000만~2억5000만원을 받는다. 이들은 배우로 이름을 얻은 사람들이다. '신 스틸러' 조연급의 경우 한 해에 영화 두 편에 출연하면 3억~4억원을 번다. 여기에 광고(CF) 출연료까지 더하면, 속된 표현으로 돈방석에 앉게 된다. 문제는 '신 스틸러'가 아닌 조연급 배우들. 조연급에서 양극화 현상이 심화된다. 이른바 '부익부 빈익빈'이다. '사랑하니까, 괜찮아'를 제작한 이창세 대표의 말이다.

"조연급들이 힘든 경우가 많다. 단역배우로 나서기는 어정쩡한 조연급 배우들의 경우에는 1년에 한 편 출연 기회를 잡기도 쉽지 않다. 이런 조연급 배우들은 출연료가 1000만~2000만원이다."

조연급이 되려면 대부분 연기경력이 10년 이상이 넘는다. 나이도 30~40대고 가정도 갖고 있다. 이런 사람이 일 년에 한 편 찍어서는 도저히 생활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단역배우의 사정은 어떤가. 단역배우 캐스팅은 일정한 기준이 없다. 감독을 비롯한 제작진과의 친분에 따라 캐스팅이 결정된다. 연기 기본만 갖췄다면 누가 해도 큰 차이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단역배우들은 촬영횟수가 3~4회라고 했을 때 출연료가 200만~300만원. 물론 그 이하의 출연료를 받는 배우도 있다. 출연료를 받지 않아도 좋으니 단역배우로 출연시켜 달라는 이들도 많다. 단역배우는 말 그대로 단역으로 나오다 보니 대중이 그를 기억하기는 쉽지 않다.

다시 이창세 대표의 말을 더 들어보자.

"단역배우들은 대부분 아르바이트를 통해 생활을 유지한다. 문제는 조연급 배우들이다. 조연배우들은 얼굴이 알려져서 아르바이트도 아무거나 쉽게 할 수가 없다. 단역배우들이 가장 많이 하는 아르바이트는 대리운전이다. 그리고 영화 스태프들 중에는 미술팀을 통해 인테리어 업체에서 막노동에 가까운 아르바이트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기자는 실제로 아르바이트로 살아가는 단역배우를 만나고 싶었다. 영화계를 잘 아는 사람을 중간에 넣어 섭외를 시도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영화계 인사는 단역배우들이 자신의 처지를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대중은 연예인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다. 얼굴이 알려지면 당연히 돈도 많이 벌 것으로 간주한다. 이런 대중의 시선이 조연배우들의 운신의 폭을 좁게 만든다.

영화계에서 송강호는 흥행 보증수표로 통한다. 그 역시 무명배우로 춥고 배고픈 시절을 견뎌냈다. 1967년생인 송강호는 부산경상대 방송연예과를 나온 뒤 극단 연우무대에 들어갔다. 데뷔작은 연극 '동승'. 이후 송강호는 극단 '차이무'와 '새벽'을 거치며 배우의 기본기를 다졌다. 연극배우들 상당수는 영화나 드라마로 발탁되기를 꿈꾸며 오늘도 대학로에서 배고픔을 참으며 연기를 한다. 영화나 TV로 가야 이름을 얻고 돈 벌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송강호가 영화에 데뷔한 것은 1997년작 '초록물고기'. 그의 나이 서른 살. 이창동 감독의 '초록물고기'에는 한석규·심혜진·문성근 등이 출연했다. '초록물고기'에서 송강호는 주인공 한석규를 괴롭히는 건달로 잠깐 나왔다. 송강호는 단 한 번의 단역 출연에서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고, 제작진의 눈에 띄었다. 두 번째 작품인 '넘버 3'에서는 하루아침에 조연을 맡았다.

송강호가 배고픈 연극판에서 버틴 시간은 7년. 연극판에서 7년 만에 영화로 발탁된 경우는 매우 예외적이다. 알려진 대로 최민식·설경구 등이 송강호처럼 연극판에서 잔뼈가 굵어 영화에서 성공한 경우다. 최근 '방황하는 칼날'에서 주연을 맡은 이성민도 연극판 출신이다. 이성민은 극단 차이무 소속으로 대학로에서 수십 편의 연극무대에 섰다. 2000년대 후반 들어 TV드라마에 진출해 '브레인'에서 주목을 받았다.

영화에서도 러브콜이 이어져 '변호인'과 '관능의 법칙'에서 조연을 맡았고, '방황하는 칼날'에서 마침내 주연으로 등극했다. 이성민과 비교해도 송강호는 운이 좋은 경우라고 말한다. 무명배우로 보낸 7년이라는 시간은 상대적으로 짧다는 얘기다.

동국대, 한양대, 중앙대, 단국대, 서울예대 등은 '배우'로 훈련시키는 학과를 갖고 있다. 연극영화연기, 방송연기, 공연연기, 연기뮤지컬, 연기과 등으로 학과 명칭은 조금씩 다르다. 실제로 유명 배우들을 배출했다. 그 결과 이들 주요 대학의 연기전공 학과의 경쟁률은 매년 수십 대 일을 넘는다. 2012년 전국의 연기전공 재학생은 5262명이었다. 매년 1300명 이상이 배우의 꿈을 안고 도전한다.

어디 그뿐인가. 여의도 방송가나 신촌 대학가 근처에는 사설 연기학원들이 수두룩하다. 이들 연기학원들은 단역 출연을 책임진다며 학생들을 모은다. 그러니 최소 1500명 이상이 스타라는 신기루에 홀려 방송가, 영화가, 연극가를 떠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단역배역 하나 잡기도 하늘의 별 따기와 같다는 것을 금방 깨닫는다. 배우 지망생은 넘쳐나는데 출연 기회는 부족한 현실. 바로 이런 틈새를 노리는 악마들이 기승을 부린다. 바로 영화감독이나 방송국PD 사칭 범죄다. 세상물정 모르는 배우 지망생 여성에게 접근해 출연을 미끼로 돈과 쾌락을 사취하는 범죄다.

지난 2월 말 경주에서 일어난 부산외국어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사고. 이 사건은 또 한번 한국사회의 고질인 비리사슬을 드러냈다. 이 사고는 뜻하지 않게 무명배우의 삶을 조명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구에서 극단을 운영하던 마흔네 살의 배우 최정운씨. 최씨는 경성대 연극영화과를 졸업했다. 재학 시절 그는 연극영화과의 스타였다. 학내에서 연극이 올려질 때마다 최씨는 주연을 도맡아 했다. 대학 졸업 후 그는 고향인 대구에서 극단을 차렸다. 그러나 극단 운영이란 게 예나 지금이나 배고픔의 연속.

최씨는 가정과 극단을 꾸리기 위해 돈이 되는 아르바이트는 가리지 않고 했다. 2월 말 그는 한 이벤트 업체로부터 부산외국어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아르바이트를 제안받았다. 오리엔테이션 현장을 촬영해 편집해 달라는 것이었다. 일당은 10만원. 그러나 최씨는 베트남 출신 아내에게 그날 밤 일하고 있다는 마지막 문자를 보내고는 불귀(不歸)의 객이 되었다.

영화사 더드림픽쳐스는 '깡철이' '반창꼬' '용서는 없다' '마마'를 제작한 영화사다. 이민호 대표는 11년째 더드림픽쳐스를 운영해오고 있다. 이 대표는 "누구도 한 번에 스타가 될 수 없기에 누구나 겪는 단역배우를 거쳐야 한다"면서 "단역배우를 하면서 어려운 시절을 견뎌내야만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대표는 어려운 시절을 견뎌내려면 당연히 아르바이트를 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 대표의 설명이다.

"조연배우나 단역배우는 제작진과의 인간관계에서 캐스팅되는 경우가 많다. 아르바이트를 하더라도 기왕이면 영화 관련 아르바이트를 하는 게 좋다고 권하고 싶다. 여기저기 오디션을 찾아다니는 것보다 그게 낫다. 그래야만 제작진들과 인맥이 생기고 아무래도 기회가 많아진다. 또 현장에서 일할 경우 숙식이 제공되고 아르바이트 이상의 수입이 생긴다."

우리나라에서는 1년에 상업영화가 50~60편씩 제작된다. 60편이라고 했을 때 한 편당 남녀 주인공이 한 명씩이라면 모두 120명이 필요하다. 그런데 A급 배우들이 1년에 2~3편의 영화에 출연한다고 하면 실제 주연배우의 숫자는 60명 안팎으로 줄어든다. 여기서 이민호 대표의 말을 다시 들어보자.

"대략적으로 볼 때 영화 시장에서는 20대 주연배우 남녀 20명, 30대 주연배우 20명, 40대 주연배우 20명씩이 소요된다. 우리나라 상업영화 시장 규모가 연간 60편 정도이므로 주연배우 숫자가 더 많아지는 게 현실적으로 어렵다. 그러므로 단역배우에서 시작해 주연배우가 된다는 게 정말 힘든 것이다."

기자가 이민호 대표에게 "단역배우에서 스타가 될 가능성을 수치로 계량화해줄 수 있는지"를 물었다. 이에 이민호 대표는 "솔직히 1만분의 1의 확률도 안 된다"고 털어놓았다. 단역배우 1만명 중 한 명꼴! 0.0001퍼센트의 가능성은 단역배우로 1년에 몇 편씩 영화를 찍고 있는 경우에 해당한다. 아직 단역배우조차 되지 못한 지망생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다.

배우의 세계를 모르는 이들은 반문한다? 왜 그렇게 배고픈 배우를 하려고 하냐고. 한마디로 배우라는 직업이 너무나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학창 시절에 한 번이라도 무대에 서본 사람은 연기하는 맛을 안다. 대학로에는 연기를 하고 싶어하는 이들이 넘쳐난다. 비록 출연료가 없어도 배우로서 출연경력을 쌓으려는 이들이 줄을 선다. 이런 경력을 쌓아야 방송이나 영화에서 기회를 잡을 수가 있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우봉식의 죽음을 어떻게 봐야 하나. 사회구조적인 문제인가, 연예계의 특수한 사정인가. 취재결과를 종합하면 우봉식은 아주 예외적인 경우라는 게 중론이다. 배우들은 어떻게든 경제활동을 한다. 본인이 아르바이트를 하든, 집안의 누가 돈을 벌든가. 그것도 아니라면 부모의 도움을 받든가. 왜냐하면 배우라는 직업은 누가 시켜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연극이 한 편 공연되는 데는 보통 2개월이 소요된다. 한 달간 연습하고 한 달간 막을 올린다. 주연급을 제외한 배우들은 2개월간 100만~150만원을 받는 조건으로 무대에 선다. 간혹 이마저도 극단 측이 지급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연극연출가는 "이제 연극판에서도 계약서를 쓰는 관행을 정착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계약서를 쓰지 않고 하다 보니 관객이 들지 않으면 출연료를 주지 않을 때도 있다는 뜻이다.

배우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들이다. 어디에 얽매이는 걸 본능적으로 거부한다. 원로배우 신구씨는 2009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배우란 직업의 장점에 대해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매일 시간 맞춰 출근할 필요가 없는 거 배우가 좋지. 또 넥타이 매고 출근하는 것도 안 해서 좋고. 명절도 없이 밤낮으로 일하는 건 나쁘지만."

한국배우협회에는 1000여명의 회원이 있다. 물론 배우협회에 등록하지 않은 배우도 많다. 안치용 한국배우협회 이사는 극단 '신협'의 대표를 맡고 있다. 안치용 이사는 "등록된 회원의 절반 이상이 연간 출연료 소득이 1000만원 이하"라고 말했다. 배우협회 회원 대부분은 다른 경제활동을 하면서 배우를 병행한다.

배우로 생계를 유지한다는 것은 여전히 힘들다. 무명배우의 경우 상황은 오히려 악화되고 있는 측면도 있다. 대형 기획사의 영향력이 커졌기 때문이다. 유명 극단이나 대형 기획사에 소속되어 있지 않은 무명배우들은 점점 기회를 잡기가 어렵다. 작은 배역마저도 대형 기획사 소속 신인들에게 먼저 돌아가는 경우가 잦다.

안치용 배우협회 이사는 "극단에도 기획사에도 소속되지 못한 프리랜서 배우는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 이런 배우들은 그만큼 선택받을 기회가 적다는 의미다. 우봉식의 비극은 아마도 이런 사각지대에서 발생한 것인지 모른다.

이런 가운데 한 가닥 희망의 빛이 보인다. 2012년 말 국회에서 예술인복지법이 통과되어 2013년 한국예술인복지재단이 설립되었다는 사실이다. 지난 2월부터 자격을 갖춘 예술인에게 3~6개월간 일종의 실업급여를 지급한다.

상황이 열악하다고 배우 지망생들이 줄어들까. 전혀 그렇지 않다. 배우는 그 자체로 너무나 매력적인 직업이기 때문이다. 할리우드 배우 크리스천 베일은 '배트맨' 히어로다. 그는 2011년 개봉된 영화 '파이터'에서 조연을 맡았다. 기자가 물었다. "배트맨이 주연이 아닌 조연을 맡으니 기분이 어떤가"라고. 크리스천 베일이 대답했다.

"연기는 상점에서 살 수 있는 물건이 아니다. 큰돈을 주면 좋은 연기를, 적은 돈을 주면 나쁜 연기를 하는 배우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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