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크림반도가 러시아에 사실상 무혈 흡수 합병된 후 미국과 유럽 등 서방이 대처 방안을 두고 고심하고 있다.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재만 해도 실효성에 대한 의문이 끊이지 않는 데다 각국의 경제적 이해 관계가 엇갈리면서 계산법도 나라마다 복잡해졌다. 영미권 매체에는 전문가들의 진단과 조언도 속출하고 있다.
뉴욕타임스(NYT)는 20일 피터 분 영국 런던정경대학 경영평가연구소 연구위원과 국제통화기금(IMF) 수석 이코노미스트를 지낸 시몬 존슨 MIT 경영대학원 교수의 공동 기고문을 실었다. 두 사람은 ‘러시아 제재의 경제학’이라는 제목의 글에서 우크라이나 사태를 둘러싼 외교적 이합집산 이면의 각국 경제적 이해관계를 심층 분석했다. 아래는 요약.
◆ 러시아 제재가 불편한 서방국
군사적 압박 같은 확실한 조치가 없으면 러시아에 대한 제재가 별 소용 없다는 것은 서방국들도 잘 알고 있다. 자산 동결이나 비자 면제 중단 등의 제재 카드가 거론됐을 때 러시아는 미동조차 없었다.
러시아의 크림 자치공화국 합병이 얄밉지만, 서방국 입장에선 그렇다고 작정하고 러시아를 견제하기도 곤란하다. 당장 독일만 보더라도 러시아로부터의 가스 공급이 중단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또 자국 자동차 기업들을 비롯해 많은 기업이 러시아에 투자한 상태라, 러시아 제재에 발벗고 나서기 불편한 입장이다. 영국도 러시아 투자자들을 잃게 될까 조심한다.
미국도 정치권에서는 러시아에 대해 불편한 감정을 곧잘 드러낸다. 하지만 러시아 사업 비중이 큰 미국 기업들이 피해를 보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있다. 특히 최근 러시아 사업 부문을 강화한 엑슨모빌과 펩시, 시티그룹 등은 러시아 제재에 따른 후폭풍을 우려한다.
미국의 여러 기업들은 소련이 해체된 후 러시아라는 큰 시장과 막대한 자원을 보고 진출했다. 주로 에너지·제조·소비재 업체들이다. 맥도널드는 러시아에 400곳이 넘는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 펩시콜라는 1972년 글로벌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러시아에 진출해 생산·판매 허가권을 땄다. 수십억달러가 넘는 돈을 투자해 러시아 유제품·음료 업체들을 인수하기도 했다.
◆ 일거양득 러시아…'뭘 해도 남는 장사'
블라디미르 푸틴은 이번 우크라이나 사태로 크림 반도도 얻고, 정권 지지도도 올라가는 일거양득의 효과를 누렸다. 크림 합병을 계기로 앞으로 우크라이나에서 더 많은 지역을 합병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얻었다. 시간이나 상황이 모두 러시아 편이다. 러시아 경제가 나아지고 우크라이나 동부와 남부 지역의 러시아계 주민 동요가 심해질 경우, 우크라이나 분리 독립과 러시아 합병을 요구하는 물결은 더 거세질 것이다.
◆ 우크라이나, 러시아와의 불편한 '동침'이 변수
반면 우크라이나의 경제 사정은 절망적이다. 최근 환율 추세를 감안하면, 앞으로 2년간 국가가 변제해야 할 채무와 예산 부족분은 400억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산된다.
국가 부도 위기까지 내몰린 우크라이나로서는 경제 회복을 통한 국가 안정이 크림 사태를 가장 잘 마무리하는 방법이다. 비록 크림 반도를 잃었지만 어수선한 국가 분위기를 추스를 가능성은 얼마든지 남아 있다. 문제는 우크라이나 경제를 획기적으로 개혁해야 하는데, 아직까지 무능하고 부패한 지도층이 대부분 국가 정책을 주도하고 있다는 현실이 걸림돌이다.
러시아가 여러 측면에서 우크라이나에 강한 지배력을 갖고 있다는 점도 부담이다. 일단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의 가장 큰 교역 상대국이다. 러시아에 대한 부채도 이미 과할 정도며,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지나치게 높아 앞으로도 종속 관계의 빌미가 될 소지가 있다.
자칫 러시아의 ‘한마디’가 우크라이나의 정치적 혼란과 사회 불안을 불러올 수도 있다. 러시아와의 관계 회복이 성장의 선제 조건이다. 한때 국내총생산(GDP)이 이웃 폴란드나 루마니아를 앞질러 러시아의 70% 수준일 정도였던 우크라이나는 이제 꼼짝없이 러시아와의 불편한 ‘동침’도 마다할 수 없는 상황에 놓였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서방국가들의 영향력은 미미하다. 실질적인 도움도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IMF 등을 통한 재정 지원도 그다지 효과적이지 않을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우크라이나의 현재 사정을 감안하면 서방의 지원 자금도 우크라이나가 정상을 회복하고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에 이르기도 전에 낭비될 가능성이 크다.
유럽연합(EU) 가입을 통해 국가 성장을 위한 제도적 틀을 더 확고히 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경우 러시아를 자극하는 역효과를 낼 수도 있어 쉽지 않다.
우크라이나 정부가 곧바로 실행에 착수해야 할 것은 대대적인 부패 청산이다. 공무원을 청렴한 사람들로 교체하고 세제를 단순화하며 규제 정책이나 사법기관을 개혁해야 한다. 정치적 정당성이 선결 조건이다. 이를 위해 새 대선과 총선을 실시해야 한다. 그 위에 유럽이든 IMF든 외부의 지원이 더해질 때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