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마치 국제사법재판소로 가기만 하면 당장이라도 승소할 수 있는 것처럼 강력한 공세를 취하고 있다. 일본이 자신 있게 제시하는 근거들이 대한민국에는 불편한 진실일 수 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고 했다. 승리하기 위해서는 약한 고리를 강한 고리로 바꾸어야 한다. 대한민국에 약한 고리로 보이는 것들을 찾아보고, 그를 분석해 보자.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의 첫 번째 근거는 뭐니 뭐니 해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2조다. 1951년 9월 8일 연합국 측 48개국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제2차 세계대전을 마무리 짓는 최종합의였다. 강화조약 제1조는 이러한 취지를 분명히 선언하고 있다.
강화조약은 1952년 4월 28일 발효되는 것으로 되어 있으므로, 이날부터 일본은 미국의 간접통치에서 벗어나 일본의 영토와 영해에 대해 완전한 주권을 행사하게 된다. 강화조약 제2조는 일본이 완전한 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영토와 영해를 규정하고 있다.
이처럼 강화조약 제2조는 일본의 영토와 영해를 적극적으로 규정하지 않고 일본의 영토와 영해에서 제외되는 지역들을 나열하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일본의 독도영유권 주장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일본이 포기해야 하는 한국에 독도가 포함되어 있지 않으므로 독도는 여전히 일본 영토라는 것이다.
문제는 일본의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역사적 사실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1951년 7월 19일자 '양유찬 서한'과 1951년 8월 10일자 '러스크 서한'이 바로 그것이다. 강화조약이 체결되기 50일 전 대한민국은 주미대사 양유찬의 이름으로 미 국무부에 서한을 전달했다.
1945년 8월 9일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날이다. 일본은 8월 15일 항복을 선언하고 9월 2일 미국 전함 미주리함 선상에서 항복문서에 서명하였다. 항복문서에는 포츠담 선언을 수용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전후 문맥에 의할 때 양유찬 서한의 1945년 8월 9일은 1945년 9월 2일의 오기로 보인다. 어쨌든 대한민국은 강화조약에 의하여 비로소 일본이 한국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이 항복하여 포츠담 선언을 수용한 1945년 8월 9일에 이미 한국의 모든 권리가 회복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독도와 파랑도를 강화조약에 명시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파랑도는 이어도를 말한다. 이에 대한 답이 바로 러스크 서한이다.
1945년 7월 26일 공포된 포츠담 선언은 총 13개조로 되어 있는데, 일본의 영토에 관한 규정이 포함되어 있다.
일본은 이러한 러스크 서한을 근거로 강화조약상 독도가 일본 영토로 인정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 몇 가지 정황이 일본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첫째는 일본이 강화조약에서 독도를 빼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이고, 둘째는 십수차례 변경된 강화조약 초안에 독도가 명시되기도 하고 빠지기도 했다는 점이다. 1949년 3월 19일자 강화조약 1차 초안에는 제주도, 거제도, 울릉도 다음에 리앙쿠르락(독도)이 명시되어 있었다. 5차 초안까지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1949년 12월 8일에 작성된 6차 초안에 리앙쿠르락이 제외되었다. 1949년 11월 14일 일본의 고문 윌리엄 J. 시볼드의 전문이 발송된 뒤의 일이었다.
시볼드는 미국 해군사관학교 졸업 후 주일 미대사관 무관으로 근무하다가 법대에 들어가 변호사가 된 뒤 도쿄에 법률사무소를 열고 활동한 사람이다. 일본 문화에 심취했고 일본어 실력이 뛰어나 1934년 일본 민법을 영역 출간하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 해군 전투정보국 태평양지부장으로 활동했고 전쟁 후에는 맥아더사령부 정치고문실 외교국장이 되었다. 대일이사회 대표와 미 국무장관 주일 정치고문도 겸하였다. 시볼드는 5일 뒤 미 국무장관에게 정식 의견서를 발송한다.
제6차 초안에는 ‘일본 영토는 혼슈, 규슈, 시코쿠, 홋카이도의 4대 섬과 대마도, 다케시마…를 포함하는 모든 인접 군소 섬들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규정되었다. 7차 초안에는 다시 한국 영토로 기재되었다가 8차, 9차 초안에는 일본 영토로, 10차 초안에는 아예 섬들의 명칭을 명시하지 않는 것으로 초안이 작성되기도 하였다.
반면 당시 강화조약 실무반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던 영국의 초안에는 리앙쿠르락이 한국 영토에 들어가 있었다. 영국과 미국은 7차에 걸친 합동토론회를 가쳤고 영·미 합동초안 최종안에는 독도가 명시되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들은 당시 독도의 소속에 대해 상당한 논란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일본은 이러한 논쟁을 거쳐 독도가 최종적으로 일본 영토로 인정받은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강화조약 제2조에 독도가 명시되지 않은 것은 독도가 일본 영토로 유보되었기 때문이라는 일본의 주장은 독도 귀속문제가 강화조약의 해석문제라는 것을 의미하며, 이러한 조약의 해석문제는 법률적 분쟁으로서 국제사법재판소의 관할에 해당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국제연합 헌장에 부속되어 있는 국제사법재판소 규정은 조약의 해석문제가 국제사법재판소의 관할에 해당한다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베 총리가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겠다고 공언하는 것은 이 규정에 근거한 것이다. 다만 대한민국은 동조 제3항에 따라 1991년 UN 가입 당시 국제사법재판소의 강제관할을 유보하였기 때문에 일본의 단독제소만으로는 재판이 성립할 수 없다.
이상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 기초한 일본의 주장을 살펴보았다. 일본의 주장은 상당한 설득력이 있고 대한민국을 불편하게 한다. 대한민국은 일본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철저한 반박논리를 갖추어야 한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2조에는 독도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 이는 독도가 대한민국과 일본 중 어느 나라의 영토인지에 관해 해석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박 논리는 여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일본은 독도가 한국 영토로 명시되지 않은 것은 독도가 일본 영토로 판명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추론이 잘못되었다는 것만 증명하면 강화조약은 대한민국의 강한 고리가 될 수 있다. 강화조약의 해석에 의할 경우 독도는 대한민국의 영토가 분명하다. 근거는 다음과 같다.
① 조약의 문언적 해석에 의할 경우 독도는 한국 영토로 해석된다.
조약은 그 문언적 의미에 충실하게 해석되어야 한다. 일본은 강화조약 제2조에 독도가 빠져 있기 때문에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일본의 주장에는 중대한 맹점이 있다. 한반도에는 약 3000여개의 부속 섬이 있다. 일본의 주장대로라면 3000여개의 섬 중 영토조항에 명시된 제주도, 거제도, 울릉도만 한국의 영토이고 나머지 약 2997개의 섬은 일본의 영토로 해석되어야 한다. 이러한 해석이 명백한 오류라는 점은 분명하다. 동 조항에 나열된 3개의 섬은 예시에 불과하다. 따라서 독도가 명시되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독도가 일본 영토로 귀속되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논리적 비약으로 용납될 수 없다.
② 연합국은 시종일관 독도를 한국의 영토로 취급하였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연합국 측 체결 당사자는 미국을 포함하여 48개국이다. 미국은 이들 연합국을 구성하는 하나의 국가에 불과할 뿐 연합국을 대표할 권한이 없다. 연합국 측은 1945년 12월 16일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연합국의 최고의사결정기관으로 극동위원회를 설치 운영하기로 하고 연합군최고사령부를 통해 제반 업무를 집행하였다.
연합군최고사령부는 1946년 1월 29일 훈령 제677호를 발령하여 독도를 일본의 통치 및 행정 범위에서 제외하고, 6월 22일 훈령 제1033호를 발하여 일본의 독도 12마일 이내 접근을 금지하였다. 당시 한국은 미 군정 직접통치하에, 일본은 미 군정 간접통치하에 있었는데 연합군최고사령부 관할지도에 의하면 독도는 한국에 속해 있었다.
③ 러스크 서한은 양유찬 대사에게 전달된 극비문서로서 일본이나 다른 연합국들은 오랫동안 그 존재를 알지 못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양유찬 주미대사를 통해 한국의 의견을 전달하였는데, 이에 대한 답변이 바로 러스크 서한이었다. 러스크 서한은 양유찬 대사에게 전달되었는데, 서한이 작성 전달된 사실은 외부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일본이 러스크 서한의 존재를 안 것은 당해 외교문서의 비밀이 해제된 이후였다. 일본은 수십 년 뒤에 비밀해제된 미국의 외교문서를 뒤지다가 우연히 발견한 러스크 서한을 마치 전가의 보도처럼 휘둘러대고 있다. 러스크 서한이 극비문서였다는 사실은 이것이 연합국의 공식적인 입장이 아니라 러스크 내지는 미국의 독자적 의견에 불과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④ 러스크의 견해는 일본이 제공한 왜곡된 정보에 기초하여 형성된 잘못된 견해였다.
1947년 6월 일본은 '일본 본토에 근접한 작은 섬들'이라는 소책자를 발간하였다. 당시 미국 관료들은 일본이 제작한 소책자를 보고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상세한 자료들이 총망라되어 신빙성이 매우 높아 보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소책자에는 독도에 관한 사실들이 왜곡 기재되어 있었다. 러스크는 이 책자에 있는 문구들을 그대로 신뢰하여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판단하였다. 시볼드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작성한 문서에는 이 책자의 내용이 그대로 인용되어 있다.
다줄렛은 울릉도, 리앙쿠르락은 독도를 가리킨다. 일본은 독도가 한국 명칭이 없고 한국에서 제작된 지도에도 나타나지 않는다고 왜곡 기술하고 있다. 러스크는 일본의 거짓 문헌에 속아 잘못된 판단을 했다. 이러한 러스크의 견해가 강화조약 해석의 기준이 될 수는 없다는 점은 명백하다.
⑤ 당시 미국은 독도를 명시하지 않음으로써 독도의 소속을 불분명하게 만들었을 뿐 일본 영토로 인정한 것이 아니었다.
미국이 강화조약에 독도를 명시하지 않기로 방침을 정한 것은 1951년의 일이었다. 1950년 1월 미 국무장관 애치슨이 발표한 태평양 방위선에는 한국이 제외되었고 6월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북한은 순식간에 부산을 제외한 남한 전체를 점령해 버렸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서울을 탈환하고 원산까지 진격했지만 1951년 1월 4일 중공군의 개입으로 다시 후퇴하게 된다.
당초 미국은 대한민국을 공산세력에 대한 최종방어선으로 생각하고 패전국인 일본을 강하게 응징하겠다는 취지에서 강화조약 초안을 논의하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1949년 소련이 원자폭탄을 보유했다고 발표하고 중국은 공산화되었다. 한국 또한 공산화될 가능성이 농후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은 한국을 포기해야 하는 최악의 경우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었다. 한반도가 전부 공산화될 경우 독도는 군사적·지리적으로 매우 중요한 거점이 된다. 일본은 시볼드를 통하여 이러한 점을 파고들었다. 독도가 레이더 기지로 활용될 수 있다는 점을 미국에 환기시킨 것이다.
미국은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여 독도를 유보해 두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강화조약에 독도를 명시하지 않으면 만일의 경우 독도가 일본 영토라고 주장하며 군사적·지리적 거점으로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전세는 악화되지 않았고 대한민국은 건재하게 살아남았다. 이후 미국은 독도를 둘러싼 한·일 간의 분쟁에 제3국에 불과하다며 발을 빼버렸다.
이외에도 근거는 많다. 당시 대한민국과 일본에 주재하여 현지 상황에 밝았던 미국 대사나 대사관 근무자들은 독도를 한국 영토로 생각하고 있었다. 또한 미 국무부 내부에서조차 러스크의 견해가 제한된 정보하에 도출된 것으로 다른 정보에 의해 얼마든지 변경될 수 있다는 견해도 있었다.
대한민국은 이러한 반박논리로 이들을 설복시켜야 한다. 서로 평행선을 긋는 피상적 주장만으로는 결코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점을 명심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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