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을 보면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의 패널이 가끔 나온다. 매일 얼굴을 볼 수 있는 고정 패널은 아니지만 어쩐지 친근한 얼굴. 이야기를 하다 속이 시원하게 노래를 부르기도 하고, 익살스러운 포즈로 춤을 추기도 하는 그녀는 가수 박현빈의 엄마 정성을 씨다. 그러고 보니 얼굴도 닮았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아들 모습이 절로 오버랩되는 밝고 긍정적인 캐릭터까지 판박이다.

가수 박현빈의 엄마 정성을 씨는 백화점 노래강사 경력 17년을 자랑하는 베테랑이다. 트로트의 왕자로 미친 존재감을 나타내는 아들을 낳은 엄마답게 본인의 끼도 장난이 아니다. 덕분에 주부들 사이에서는 박현빈 이상의 인기를 끌고 있는 스타 강사이자 힐링 멘토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 존재다. 그녀의 에너지 넘치는 수업을 들으면 절로 힐링이 된다는 주부 팬들도 상당하다.

박현빈만큼 유명한 스타 노래강사

"지금 백화점 수업 끝내고 오는 길이에요. 제가 스케줄이 좀 많은 편이에요. 하루에 두 개씩은 꼭 있는 것 같아요. 주부 대상으로 하는 노래교실 수업하고, 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학생들도 가르칩니다. 현빈이보다 오래 활동했죠. 벌써 17년째 해온 일이에요. 믿기 힘들겠지만, 현빈이 스케줄이 좀 뜸할 땐 제 수입이 더 많을 때도 있다니까요."(웃음)

완벽한 메이크업에 에너지 넘치는 스타일의 정성을 씨는 스타 노래강사다. 백화점 노래교실, 대학교 평생교육원 등에서 노래를 전문적으로 가르친다. 아들 덕분에 얼굴이 알려졌지만 모든 것이 본인 스스로 일궈온 경력이다. 주부 팬들을 거느리는 삶은 아들 박현빈보다 일찍 시작되었다.

“음악을 좋아했어요. 미8군 무대에서 보컬로 활동한 경력도 있고요. 결혼 후에는 집에서 살림만 했는데 우연히 시작했어요. 저와 같이 노래강사로 활동 중인 동생이 ‘언니, 백화점에 노래교실이란 게 있는데 한번 해봐’ 하고 권해주더라고요. 처음 백화점 생기고 교양강좌가 있을 때였는데,  ‘이런 게 다 있어?’ 하면서 시작했죠.”

우연히 시작한 일이지만 적성에 꼭 맞는 일이었다. 노래교실 강사는 수준급의 노래 실력뿐 아니라 주부들을 휘어잡을 수 있는 입담과 카리스마가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에너지 넘치는 열띤 강의가 트레이드마크인 그녀의 말 한마디에 주부들은 울고 웃으며 스트레스를 날려버렸다. 문화강좌가 자리를 잡으면서 그녀의 활동 분야도 후배 양성을 위한 대학교 평생교육원 등으로 영역이 넓어지고 있다.

집안 망해도 음악 시킨 열혈맘

트로트 가수 박현빈이 성악을 전공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의 형은 독일에서 오페라 가수로 활동 중이다. 정성을 씨의 음악에 대한 남다른 교육 열정이 두 아들을 음악 전공자로 키워냈다. 두 아들에게 성악뿐 아니라 피아노, 바이올린, 플루트 등 다양한 음악을 접하게 했다. 남편 사업이 실패해서 집안이 기울었을 때도 아이들 음악 교육에 대한 끈은 놓지 않았다. 큰아들은 외국으로 유학까지 보냈다.

“덕분에 오해를 많이 받았어요. 음악은 돈이 많이 드니까 집이 부자인 줄 알아요. 한 명만 시켜도 기둥이 뽑힌다는 말이 있는데 둘이나 시켰으니 그럴 법도 하죠. 그런데 집은 완전히 망해서 집도 절도 없는 형편이었거든요. 그러니 사람들이 또 그러죠. 엄마가 욕심이 많아서 아들 음악 시켜서 부귀영화 누리려고 한다고요.”

여기서 정성을 씨의 인생관이 드러난다. 중소기업 수준의 ‘억’ 소리 나는 부채가 있을 정도로 어려운 상황, 어느 날 갑자기 집이 없어져 친정에 얹혀살았지만 그 어려움이 크게 다가오지 않더란다.

“계산을 해보니, 65살까지 갚으면 되겠더라고요. 돈 문제는 언젠가는 해결이 되니까 자신감이 있었어요. 제가 열심히 강의를 하면 되니까요. 힘든 상황에서도 희망을 보는 스타일인 것 같아요. 대신 ‘하고 싶은 것’에 대한 절절함은 있어요.”

그녀가 하고 싶은 것은 음악이었다. 삶에서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본인이 음악에 적을 둔 인생을 살아보니, 좋아하는 것에서 받는 충만함이 무엇인지 너무 잘 알게 되었단다. 두 아들에게도 좋아하는 일을 할 때의 기쁨을 알게 하고 싶었다.

“어렸을 때부터 음악성이 있다는 것은 알았어요. 피아노나 플루트를 가르쳐보면 아이들이 빨리 흡수해요. 한 번 가르치면 두세 번 가르칠 필요가 없던 아이들이에요. 외우지 않아도 되는데 외워버리기도 하고. 잘 시켜보고 싶었어요. 잘하는 것이 음악이니까 도와준 거예요.”

경제적으로 힘든 시절을 겪었지만 지금은 그런 본인의 선택에 후회가 없다. ‘빚을 갚아야 하는데 아이들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지’ 생각했다면 아무것도 못했을 것 같단다. 아직도 빚은 갚아나가고 있지만 좋아하는 일, 행복한 일을 선택하도록 도와줬다는 자부심이 있다.

쓰러진 집안 일으킨 효자 아들

그렇게 성악에 적을 두었던 박현빈이 쓰러진 집안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 트로트 가수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과정을 지켜본 엄마의 입장에서는 안타까운 마음도 들었을 터.

“그땐 엄마로서 짠한 마음이 들 여유도 없을 정도로 힘들었어요. 원래부터 넉넉한 형편도 아니었는데, IMF 터졌을 때 남편이 하던 사업도 쫄딱 망했거든요. 집이 사라졌고, 가족들은 친정집에 신세를 졌어요. 군대를 다녀온 현빈이가 이래선 안 되겠다며 가수의 길로 들어섰어요.”

그렇게 절박하게 데뷔한 박현빈은 홈런을 날렸고, 이후 지금까지 쉬지 않고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지금은 조금 여유가 생겼지만, 데뷔 후  4~5년까지만 해도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의 스케줄을 소화하는 힘든 시간을 보냈다.

“현빈이는 그때로 절대 다시 돌아가지 못할 것 같다고 말해요. 허리가 26인치까지 줄 만큼 힘겨운 스케줄이었거든요. 생전 해보지 않은 음악을 하고 방송 활동을 하는 것이 쉽진 않았겠죠.”

지금 박현빈 가족은 광명시 아파트에 산다. 아들이 장만해준 집이다. 독립해서 따로 살던 아들은 아랫집으로 이사를 와서 이웃사촌이 됐다. 사업 빚도 거의 해결했다. 행복한 상황이다.

“현빈이한테 고맙죠. 집에서는 왕자예요. 가족들을 이렇게 많이 도와줬으니 얼마나 고마워요.”

음악, 운동, 게임 좋아하던 어린 박현빈

정성을 씨는 박현빈이 어렸을 때부터 음악에 대한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피아노, 바이올린 등 악기를 가르치면 친구들보다 확실히 배우는 속도가 빨랐다고.

“공부를 아주 잘하는 아이는 아니었어요, 우리 현빈이가.(웃음) 저는 공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니까 괜찮아요.(웃음) 가만히 보니까 현빈이가 악기를 배우는 속도가 조금 빠르더라고요. 하기 싫다고 반항할 때도 있었지만 꾸준하게 잘 따라와줬어요.”

그렇다고 클래식에만 심취해 음악만을 사랑하는 고리타분한 신동은 아니었다. 밥을 걸러도 모를 만큼 심각하게 게임에만 빠져 지내던 시절도 있었다. 그땐 프로게이머가 되는 건가 하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그땐 밥을 주는 게 아까워서 안 줬어요.(웃음) 말린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게임에 푹 빠져 있는데 무슨 말이 들리겠어요. 그냥 그대로 뒀어요. 그런데 웃긴 것이 게임할 때 음악이 나오잖아요. 레벨이 올라가거나 하면 새로운 음악이 나오고. 그걸 아이가 즐기면서 하더라고요. 무의식중에 음악에 딱딱 맞춰서 몸을 움직이면서요. 게임보다는 음악을 타고났구나 확신했죠.”(웃음)

음악에 소질이 있었던 만큼 운동도 잘했다. 탁구를 좋아해서 탁구 선수가 되겠다고 나선 적도 있었는데, 실제 실력도 수준급이라서 중학교 시절에는 진지하게 선수가 되려고 했다고 한다. 공부를 잘한 건 아니지만 다방면에 소질이 있는 아이였다.

“이것저것 잘하니까 인기가 많은 편이었어요. 합창반 활동하면서 친구들도 많았고요. 깔끔을 떨어서 예민한 구석도 있고 고집도 있는 편이지만, 또 그건 제 카리스마로 잘 눌러서 지금의 둥글둥글한 박현빈이 되었네요.”(웃음)

며느릿감? 노래 잘하면 OK!

신세대 트로트 가수로 데뷔했지만, 박현빈도 벌써 데뷔 10년을 바라보는 중견이 됐다. 어느덧 나이도 서른을 훌쩍 넘겼다. 이제 슬슬 결혼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때다.

“제가 원하는 며느릿감이 있긴 한데, 본인 마음에 들어야죠 뭐. 저는 노래 잘하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노래강사를 오랫동안 해서, 노래 부르는 것만 봐도 저 사람이 어떤 성향의 사람인지 감이 딱 오거든요. 그런데 본인이 데리고 와야죠.”

활동하는 아들을 보면 짠할 때가 많다. 학교 다닐 때는 여자친구도 있고 사람들도 많이 만나고 다녔는데, 본격적으로 활동을 하면서 개인 생활이 전혀 없어졌다. 여자친구를 따로 만나서 밥을 먹으러 다니는 생활은 절대적인 시간 부족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회사, 매니저와만 생기는 아들의 인생 관계가 엄마로서 안타까울 때도 많다.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좋은 사람이 나타나서 잘 챙겨줬으면 좋겠어요. 혼자 힘들어할 때 옆에 누군가가 있어주면 힘이 되죠. 저는 엄마니까 아들이 힘들어할 때를 알거든요. 조언도 해주고요. 그럴 때 함께할 수 있는 좋은 사람이 나타났으면 좋겠어요. 옆에서 건강도 잘 챙겨주면 더 좋고요.”

그때까지는 본인의 몫이라며, 엄마로서 강사로서 할 일이 너무 많아서 더 부지런히 살아야겠단다. 그녀는 직접 음악을 만들어 본인의 이름으로 된 곡을 가지고 무대에 오르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다. 열심히, 그리고 재미있게 즐기다 보면 언젠가는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그녀이기에 머지않아 꿈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 같다.

[- 더 많은 기사는 여성조선 3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