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 크림반도의 부동항(不凍港) 세바스토폴은 러시아가 바다를 통해 유럽으로 뻗어나가기 위한 전초기지다. 흑해함대 함정을 배경으로 사진을 촬영한 이성훈 기자.

5일 우크라이나 크림반도의 남쪽 끝 세바스토폴. 정박장을 가득 채운 러시아 함정엔 붉은 바탕에 푸른색 엑스(X)자가 새겨진 깃발이 나부끼고 있었다. 러시아 흑해함대의 상징이다. 중무장한 러시아 군인들은 함정을 타고 해안을 따라 끊임없이 기동하며 출격 준비를 하고 있었다. 대잠(對潛) 함정은 우크라이나와 합의된 작전 경계 구역을 넘어 내륙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흑해함대로 향하는 지상에서도 경계가 삼엄했다. 러시아 군용 차량 30여대가 세바스토폴 시 경계까지 나와 작전 중이었다. 소총을 메고 검은 마스크를 쓴 군인들은 시내로 들어가는 기자의 차량을 세웠다. "한국에서 온 기자"라고 밝히자 트렁크를 열라고 요구한 뒤 샅샅이 뒤졌다. 앞의 화물트럭은 싣고 있는 박스를 군인들이 끌어내려 내용물을 확인하고 있었다. 군인들 사진을 찍으려고 하자 화가 난 듯 영어로 "노(No)"라고 외치면서 카메라를 가로막았다. 흑해함대로 통하는 도로는 완전히 통제되고 있었다.

주민과 군인만 드나들 뿐 외부 차량은 출입 금지였다. 마을 주민들이 "갯바위 쪽으로 가면 통제받지 않고 군함들을 볼 수 있다"고 알려줬다. 차량으로 산등성이를 넘어 15분가량 걸리는 거리로 이동해야 했다.

부동항(不凍港) 세바스토폴은 역사적으로 대륙 세력인 러시아가 흑해와 지중해를 거쳐 유럽으로 뻗어나가기 위한 전초기지 역할을 해왔다. 현재 러시아 흑해함대 소속 전함은 총 388척. 인근 벨벡 군사공항에 대기 중인 러시아 전투기는 160대가 넘는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최근 흑해함대의 전력을 대폭 강화하고 있다. 스텔스 기능을 갖춘 잠수함을 내년까지 배치할 계획이며, 이 잠수함들은 지중해와 대서양에서 작전을 수행하게 된다. 푸틴의 야심이 어느 곳을 향하는지 엿볼 수 있다.

무장한 러시아 군인이 5일 우크라이나 남동부 크림자치공화국의 세바스토폴 연안에서 경계근무를 서고 있다. 철조망 뒤로 우크라이나 군함이 정박해 있다. 러시아는 흑해함대 기지가 있는 크림반도를 사실상 점령한 상태다.

이날 크림자치공화국 수도 심페로폴과 약 50㎞쯤 떨어진 노보파블리브카의 우크라이나 군부대는 부대 표시 마크도 없는 정체불명 무장 군인들에 의해 포위돼 있었다. 마을 주민은 이들이 러시아계 청년들이라고 전했다. 주민 안드리예나(32)씨는 "며칠 전까지는 흑해함대에서 온 러시아군이 지역을 장악했는데, 지금은 그 역할을 스스로 자경단(自警團)이라고 부르는 러시아계 크림반도 청년들이 맡았다"고 설명했다. 이들이 보유한 자동 소총과 군용 차량은 모두 러시아군의 것이라고 한다. 푸틴은 러시아군을 움직이는 동시에 크림반도 내 러시아계를 배후 조종해 지역을 장악하는 것으로 보였다.

일부에선 우크라이나 사태가 일촉즉발의 위기는 넘겼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와 러시아가 5일 특별회의를 개최하는 등 서방과 러시아 간 대화 채널도 열렸다. 앞서 푸틴은 기자회견에서 "우크라이나에 군대를 파견할 필요성을 못 느낀다"고 말했다.

하지만 푸틴은 4일 카스피해 인근 기지에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인 '토폴(RS-12M)'의 시험 발사에 성공했다. 러시아가 장악한 크림자치공화국은 이날 우크라이나 중앙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 독자 군대를 창설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이렇게 되면 크림반도와 우크라이나 내륙 경계에 군사분계선이 생길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