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린에서 김인권은 늘 유쾌했다. 악역에도 희극적인 요소를 담아낼 만큼 그와 웃음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의 날건달 동춘이 그랬고, 의 방가는 물론 의 교통경찰 명식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어둡고 우울한 캐릭터로 관객을 맞이한다. 최근 개봉한 영화 에서 김인권은 1급 정치범이자 탈북을 기도하는 북한 지하 교인 철수 역으로 열연한다. 배우들의 재능 기부로 탄생한 이 작품은 북한 지하 교회의 실상과 인권 유린을 다룬 저예산 영화. 김인권의 세 번째 주연작이다.

개봉 전부터 많은 스타들, 심지어 진보·보수 논객의 대표 주자 진중권과 변희재로부터 응원의 메시지를 받은 은 개봉 첫날 좌석 점유율 1위를 기록했다. 초저예산, 전 배우들의 재능 기부를 감안하면 놀라운 기록이다. 개봉 전, 주연배우 김인권을 만나 영화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들었다.

북한 현실 그린 저예산 영화… 재능 기부로 참여해

“개봉하기까지 우여곡절이 참 많았어요. 시작부터 저예산이었죠. 북한 지하 교회를 다루다 보니 종교적으로 너무 편파적인 게 아니냐는 반응이 예상되기도 했어요. 한편으로 이 영화의 정확한 지점이 탈북인지 북한 지하 교회인지에 대한 고민을 많이 했어요.”

마을 사람들을 주동해 탈북을 계획하는 철수는 기독교 신자다. 김정일이 유일한 '신'인 북한에서 기독교인은 탄압받는다. 인권 유린과 탈북은 이 영화를 가로지르는 두 가지 서사다. 어두운 현실을 그대로 재현하는 만큼 김인권 역시 한층 가라앉은 연기로 무게중심을 잡는다. 실제로 극중 철수는 시종일관 미간을 찌푸리거나 입을 꽉 다문 모습이다.
"사실 감독님은 저한테 약간 코믹한 부분도 기대를 하셨대요. 무거운 소재다 보니까 제 장기를 살려서 이 영화를 좀 더 재미나게 만들어주길 바란 거죠. 근데 촬영하면서 알았지만 그건 불가능하더라고요. 북한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담아야 하는데 자칫 잘못 웃겼다가는 이 영화의 성격과 지향하는 바에 누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다 보니 굉장히 진지한 영화가 나왔네요."

북한, 인권, 지하 교회. 소재가 소재인 만큼 아무도 투자하지 않으려 했던 이 영화는 배우들의 재능 기부를 통해서야 첫 삽을 떴다. 김인권 역시 시나리오를 처음 받았을 때는 거절할 심산이었다.
"'이렇게까지 파내서 보여줄 필요가 있을까' 싶더라고요. 북한 사람들이 다 이렇게 고통받는 것도 아니고 지하 교인들에 한한 억압인데, 관객들이 영화 보는 그 시간만큼은 스트레스를 풀고 나가야 되는데 더 스트레스 받지는 않을까 싶었던 거죠. 그래서 안 되겠다 생각했어요."

그런 그의 마음을 돌린 건 감독의 굳은 의지와 열정이었다. 그간 독립 영화만 만들어 온 김진무 감독에게 은 첫 상업 영화이기도 하다.
"(거절하려고) 감독님을 처음 만났는데 엄청난 열정을 봤어요. 이런 영화가 있어야 되는 이유, 당신이 이 영화에 출연해야 되는 이유. 이걸 더 이상 반박 못 하게 말씀하시니까.(웃음) 그 열정에 감동해서 해야겠다는 생각을 한 거죠. 촬영 현장에서도 흔들림이 없었고 그 열정이 대단했어요."

의 첫 장면은 강렬한 고문 신이다. 보기만 해도 고통스러운 이 장면의 촬영 비화를 묻자 고개부터 절레절레 흔든다.
"정말 힘들었죠. 고문 촬영이 있는 날은 촬영장 가기도 싫었고요.(웃음) 죽겠더라고요. 피해가고 싶었어요. 투자도 배급도 좌절되던 차에 추가 촬영(고문 신)을 한다니까 이런다고 될까 싶기도 했죠."
최근 사회적 영화가 부쩍 많이 개봉하면서 고문 신을 볼 일도 잦아졌다. 천만 관객을 훌쩍 넘긴 이나 저예산임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이슈를 불러온 가 대표적인 예. 혹시나 배우로서 의식이나 비교는 없었을까.

"촬영 때는 고문 신이라기보다 철수의 과거라고 생각하고 찍었어요. 그 장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날 거라고는 예상치도 못했고요. 그래서 (고문 신을 참고할 목적으로) 를 봐야겠다 하는 생각은 전혀 안 했어요. 근데 나중에 편집되고 보니 그야말로 '고문 신'이 되어 있더라고요.(웃음)"
우여곡절 끝에 완성된 영화의 첫 편집본을 본 날, 그는 만감이 교차했다.
"기대 이상으로 감동적이었어요. 고문 장면이나 다큐멘터리 장면이 추가로 삽입됐는데, 덕분에 영화의 몰입도가 좀 더 높아진 것 같아요. 시청각적으로 보니까 실제 일어나는 일들이라는 게 피부에 와 닿기도 했고요. 애통한 마음이 생겼고 눈물도 많이 났어요."
실제로 기독교 신자인 그는 이 영화를 통해 '순교'(갖은 박해와 탄압에도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는 일)의 개념을 떠올리기도 한다.

"저는 아이들 먼저 교회에 데려다주고 예배 중간에서야 슥 들어가는 날라리 신자예요.(웃음) 사실 교회에서 철학적인 혜택을 많이 받았어요. 교회 연극을 통해 처음 연기를 접했고, 비뚤어질 수 있었던 시절에도 교회가 저를 잡아줬고요. 지금 저를 포함한 교인들은 편안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데, 이게 과거 수많은 사람들의 순교를 통해서 얻어질 수 있었던 거잖아요. 북한에서는 지금도 순교가 벌어지고 있고요. 순교라는 개념적 측면에서 이 영화를 보고 가장 마음이 동하실 분들은 기독교 분들이 아닐까 싶어요."
한편 이 영화는 개봉 전부터 때아닌 '신천지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제목부터 소재까지 신천지가 분명하다는 설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이 영화를 검색어 순위 상위권에 진입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
"그게 가장 이슈인 것 같아요, 그죠? 클릭 수 올리려면 그거 아니면 안 되죠? 그거 말고 뭐 다른 거 없을까요?(웃음)"

아직은 들쑥날쑥한 럭비공

에서 김인권 다음으로 눈에 띄는 배우는 홍경인이다. 대학 동문이자 선배인 홍경인과의 호흡은 어땠을까.

"제가 종종 '홍경인 선배님 덕분에 영화배우가 됐다'고 하는데, 참 고맙게 생각해요. 저는 제가 배우라는 직업을 갖게 된 게 참 행운이라고 생각하거든요. 그것 때문에 지금 이렇게 가족들과 먹고살고 관객들 만나고 기자분들과 인터뷰도 하고 있으니까요. 고맙잖아요. 그런 배우라는 직업을 처음 시작한 계기를 가만 생각해보면 경인이 형도 그중 하나예요."
최민식, 이경규, 한석규, 박신양, 김혜수, 이미연 등 수많은 톱스타들을 배출한 동국대 연극영화과에서 홍경인은 김인권의 바로 위 학번, 그러니까 직장으로 치면 바로 위 사수나 마찬가지였다.

"원래 한 학년 선배가 제일 무섭잖아요. 말 붙이기가 힘들었어요. 그 당시 최고이기도 했고요. 홍경인 선배는 그 나이에 유명 영화의 주연 배우였으니 동경의 대상이었죠. 근데 지금 그분과 제가 편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니 영광스럽기도 해요. 세월이 벌써 이만큼 흐른 게 새삼 신기하기도 하고요. "
고학년에 올라가 영화 연출을 택한 김인권은 한때 영화를 만들며 감독의 꿈을 키우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배우로서의 역량이 더 맞는다고 자평한다. 그렇다고 자신이 충분히 다듬어진 배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그는 여전히 원석이 되기 위해 끊임없이 구르는 돌멩이다.
"제가 괜찮은 배우라는 생각은 안 해요. 괜찮은 배우는 매력도 있어야 하고 깊이도 있어야 하는데 저는 아직 나이와 경험치가 더 쌓여야 할 것 같아요. 성인이 아직 안 된 느낌이랄까?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한편 언론 시사회 당시 홍경인을 가리켜 '나이가 들면서 섹시해졌다'고 말한 것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김인권 본인은 자신을 어떤 이미지로 가꿔나가고 싶을까.
"저는 아직까진 럭비공처럼 들쑥날쑥해요. 경험치도 별로 없고요. 세월이 지나면 저도 언젠가는 그런 모습을 닮아가겠죠? 될지 안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이런 영화에 출연하게 된 것도 관객들이 제게 기대하는 바가 뭔지 아직 정확하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코믹한 연기로 많이 알려지긴 했지만 자리를 덜 잡은 것 같다는 생각도 있어요. 이런저런 캐릭터를 관객들이 어떻게 받아들이실지도 궁금하고요."

한편 부쩍 슬림해진 몸매의 사연을 물었다. 이날 캐주얼 슈트를 입고 온 그는 제대로 '슈트발 받은' 모습으로 멋진 포즈를 취해 보였다.
"다이어트를 완벽하게는 못했어요.(웃음) 이 영화를 촬영 기간에 같이 찍었어요. 에서는 퇴물 가수 역이다 보니 약간 살집이 있는 모습이었는데, 의 철수는 북한 사람이니까 너무 잘 먹은 티가 나면 안 되잖아요. 그래서 밥도 좀 줄이고 머리도 덥수룩하게 하려고 했죠."

그럼에도 무엇보다 감독의 시나리오가 탄탄했다는 말을 덧붙인다. 감독에 대한 신뢰, 그것이 이 영화의 전 배우들이 노 개런티로 참여 의사를 밝힌 까닭일 터다.
"감독님이 워낙 고생해가며 쓴 시나리오라 제게는 가장 좋은 교과서였어요. 두만강에서 탈북자 잡는 인민군 생활까지 했던 실제 탈북자분께서 도와주셨고요. 그러니까 시나리오가 (현실에 정말) 가깝더라고요. 사투리는 유튜브에서 연변 방송 보면서 억양을 익혔어요. 함경북도랑 연변 사투리가 거의 비슷하다고 하더라고요. 어쨌든 북한 사투리에 꼬투리 잡을 수 있는 사람이 대한민국에 없다는 게 다행이죠.(웃음)"

세 딸들, 아직은 아빠 영화 못 봐

이번 영화로 진중한 면모를 선보인 그는 또다시 본인의 장기인 희극의 영역으로 돌아간다. 오늘 인터뷰를 마치면 강원도도 갈 예정이란다.
"이따 강원도로 죽으러 가요.(웃음) 죽는 장면을 찍거든요. 지금 또 다른 영화 를 찍고 있어요. 맛깔 나는 조연이죠. 아주 '병맛 나는' 역할이에요. 하하하. 다시 돌아가니까 기대하세요.(웃음)"
쉴 틈 없이 다음 영화에 착수하는 그에게 휴가 계획을 물었다.
"사실 아직까진 그런 여유를 부릴 틈이 없는 것 같아요. 아이들 교육 문제도 있고요.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혀야…(가능할 것 같아요). 워낙 달려온 삶이어서 그런지도 모르겠고요. 쉬는 동안엔 주로 다음 작품 뭐 할지 고민해요. 집에서는, 그냥 아빠죠.(웃음)"

아이들도 부담 없이 볼 수 있는 영화를 여럿 찍어온 그이기에 딸과 함께 본 작품이 있느냐고 물었다. 참고로 그는 세 딸을 둔 아빠다.
"아직은 같이 안 봐요. 아빠가 나오면 무서워하거든요. 아빠가 이상한 옷 입고 바보 연기 하면 싫어해요. 집에서처럼 안아주고 다정한 아빠만 생각하지, 당하고 혼나는 연기를 보면 울어버리거든요. 최근에 첫째와 (2012년에 개봉한 설경구 주연의 재난 영화. 김인권이 조연으로 등장한다)를 봤는데, 처음엔 불나니까 무서워서 못 보더라고요. 아빠 죽으면 어떡하냐면서요. '조금만 더 기다려봐. 아빠 끝까지 살아'라고 했죠. 아이가 그 영화를 끝까지 본 이유는 하나예요. 아빠가 사는지 죽는지를 보기 위해서요. 근데 요즘 애들은 을 좋아하더라고요.(웃음)"

마지막으로 자신의 소시민적인 이미지에 대해 입을 열었다. 백수 아니면 건달, 외국인 노동자에 이어 이번 영화에서는 탈북자로까지 변신한 그는 혹시 그런 자신의 이미지가 섭섭하지는 않을까.

“그런 이미지라도 있다는 것이 저는 정말 고마워요.(웃음) 코믹한 이미지라고 해서, 만날 조연이라고 해서 서운한 건 없어요. 그거라도 있는 게 진짜 고맙죠. 그리고 ‘다음 영화에서 또 다른 캐릭터로 변하면 되니까’라는 자신감이 있어서 그런지 아직까지는 어떤 역할이든 일단 도전하려는 청년 정신이 있는 것 같아요. 가능성은 열려 있으니까요. 나 자신을 어떤 이미지로 규정짓고 그 틀에 가두지는 않아요. (박)철민이 형도 (마)동석이 형도 다들 뚜벅이로 시작해 이젠 자기 얼굴 걸고 영화 하고 있으니까요.”

[- 더 많은 기사는 여성조선 3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