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시인이라면 시조(時調)와 자유시를 넘나들어야 한다. 똑같은 비단으로 옷을 해 입어도 한국과 중국 일본의 의상 문화가 다르지 않으냐. 한국 현대시는 시조의 전통 미학을 간직하고 있어야 국적(國籍)이 있는 시가 된다. 그런데 문단에선 시조와 시가 따로 놀고 있지 않느냐."

올해 제46회 한국시인협회상 수상자로 선정된 이근배 시인(74·예술원회원)이 시조와 시를 구분하는 시단(詩壇) 풍토를 질타했다. 문단에서 유일하게 시조시인협회장과 시인협회장을 두루 지낸 가객(歌客)답다. 한국인의 전통 정서와 미학을 곰삭은 언어로 노래한 시집 '추사(秋史)를 훔치다'(문학수첩)로 시인협회상을 받는다. 이근배 시인의 별명 '익은 배'에 어울리게 원숙한 맛을 풍긴다는 평을 받았다. 시집 해설을 쓴 평론가 김병익은 "이렇게, 시인 이근배는 지난날의 선비다운 묵향(墨香)으로 오늘, 이 마음 바쁜 시대를, 새삼스레 감싸오는가"라고 했다.

한국과 중국 벼루 1000여 점을 수집해 온 이근배 시인. 그는 “조선 시대 벼루 중에서 녹두색과 팥색이 섞인 화초석(花草石) 벼루야말로 최고의 예술품”이라고 했다.

현존 문학상 중 역사가 가장 오래된 상을 받는 이근배 시인을 찾아가 '오늘의 한국 시'에 대해 물었다. 그는 "김춘수 시인이 '우리나라엔 좋은 시는 많지만 위대한 시가 없다'고 했다. 진정으로 한국적인 시가 없다는 얘기였다"며 "나를 포함해 우리 시인들이 시조의 맛을 현대적으로 되살렸는가라고 스스로 뼈아프게 물어봐야 한다"고 탄식했다.

이 시인은 시집 '추사를 훔치다'에 서정시, 사설시, 인물시를 다양하게 펼쳤고 뒷부분에 시조를 집중 배치했다. '옹달샘 새벽달을/ 물동이에 길어와서/ 장독대 정화수 올려/ 띄우시던 어머니/ 꽃산에 오르실 때에도/ 달은 두고 가셨다…'라며 사모곡(思母曲)을 부르기도 했다. 그는 서예에도 조예가 깊어 추사(秋史)를 늘 흠모해왔다. 어느덧 고희를 넘기고 나선 '저 추사는 천 개의 붓을 다 쓰고도 글씨가 안 된다고 했는데 한 자루의 붓도 대머리(禿)를 만들지 못한 나는 이제 어떻게 붓을 잡으랴'하고 탄식하는 시를 썼다.

이 시인은 40년 넘게 명품 벼루를 수집해 1000여점을 소장하고 있다. 정조(正祖)가 대제학 남유용에게 하사했다는 글이 새겨진 벼루가 가장 아끼는 소장품 중 하나다. 그는 벼루를 소재로 한 시를 80편 넘게 써왔다. 그는 "러시아가 소치올림픽 때 문화를 자랑했는데 우리도 선비들의 문방사우(文房四友)와 풍류 정신을 평창올림픽 개막식에서 보여주면 된다"며 묵향 풍기는 올림픽을 제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