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리병처럼 생긴 시골 마을의 기담을 통해 온갖 욕망이 들끓는 공간을 그리고자 했다”고 밝힌 소설가 임철우.

"'어서 오십시오. 여기가 황천(黃川)입니다.' 당신은 오른쪽을 따라 흐르는 강물을 재빨리 살펴보았다. 갈수기에 접어든 강의 수면은 엷은 갈색을 띠고 있었다. 그랬었군…."

소설가 임철우가 새로 펴낸 연작소설집 '황천기담'(문학동네)은 낯선 곳으로의 환상 여행처럼 시작한다. 소설 속의 무대 황천은 실재하지 않는 공간이다. 황천은 저승을 뜻하는 황천(黃泉)과 소리가 같은 곳이다. 그 이름에 걸맞게 초현실적 사건이 자주 벌어진다. 소설 '황천기담'은 소설 속의 작가가 우연히 그 마을에서 전해 들은 기담(奇談) 모음집이다.

임철우는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일만 다루는 기존 리얼리즘의 답답한 틀을 벗어나 자유롭게 상상력을 발휘하고 싶었다"고 밝혔다. 임철우는 1980~90년대까지는 시대의 어둠을 사실적으로 그리되 시(詩)처럼 아름다운 문체로 이름이 높았다. 2000년대 이후 환상과 사실을 넘나드는 장편 소설 '백년여관'을 내놓았다. 이번에 나온 '황천기담'은 환상적 리얼리즘의 색채를 더 짙게 보여주면서 새 작풍(作風)을 시도했다.

'황천기담'은 다섯 편의 연작 단편으로 구성됐다. 소설 속의 황천은 1930년대에 금광이 많아 흥청망청했다. 그러다가 거짓말처럼 금맥이 끊기자 황천은 쇠락한 채 사람들 사이에서 잊혀버렸다. 황천의 지형은 호리병을 쏙 빼닮았다. '마을이 호리병의 둥근 밑바닥에 곰삭은 술 찌꺼기처럼 무겁게 가라앉아 있다'고 한다. 그런 마을엔 한때 모든 사람을 감탄케 한 명주 '칠선녀주(七仙女酒)'가 있었다. 술을 팔던 여인 금심이 빚은 전통주였다. 6·25 전쟁 때는 국군과 인민군이 마을을 번갈아 점령했다가 그 술을 마시곤 총을 내려놓고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고 금심이 죽은 뒤 명주의 비법도 사라졌다. 마을엔 별의별 일이 생겼다. 늘 나비를 몰고 다니며 나비와 소통하는 생물 교사, 황금광(黃金狂) 시대의 욕망이 빚은 괴물이 된 남자, 억울한 떠돌이 영혼의 말을 알아듣고 위로하는 여인, 정사를 벌이다가 자웅동체(雌雄同體)가 된 남녀 등등에 이르는 괴상한 이야기들이 일어났다.

작가는 "내가 어릴 때 어른들이 소곤대던 기담(奇談)이나 유언비어를 모티브로 차용했다"고 설명했다. 한국 사회를 지배한 폭력과 욕망의 역사도 소설의 밑바탕에 깔려 있다. 한 사내가 헛소문에 휘말려 파탄을 맞는 단편 '나비길'에선 '소문과 낚싯바늘은 피 냄새를 감추고 있다'고 한다. 소문은 낚싯바늘의 갈고리처럼 한 사람의 살 속에 깊숙이 박히면 끝끝내 유린하고 만다. 우리 사회에서 잦은 소문의 폭력을 묘사한 것이다.

이 책은 사랑의 묘약 같은 '칠선녀주'가 재현되면서 끝난다. 사랑만이 사람다운 세상을 연다는 뜻이다. 칠선녀주는 소문을 넘어설 수 있는 문학의 힘을 비유한다. 곡식이 발효를 거쳐 명주로 변하듯이 언어가 모여 이야기로 변신해 문학이 탄생한다. 작가는 "토속 설화엔 엽기뿐 아니라 해학과 익살도 넉넉하다"며 "설화의 흡인력을 되살려 소설에 새 힘을 불어넣고 싶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