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레사는 평생을 사랑과 봉사로 가난한 이들을 위해 헌신하며 ‘마더 테레사’라는 호칭을 얻었다. 테레사가 봉사를 사명으로 삼았다면 이해인에게는 시가 그랬다. 맑고 순수한 감성으로 마치 내가 쓴 것처럼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시를 써왔다. 모두의 마음을 울리는 이해인의 시는 약자들과 상처받은 이들의 마음을 위로했다. 그래서 그녀의 시를 읽은 사람들은 이해인 수녀에게 ‘국민 이모’라는 애칭을 붙여줬다. 자극적인 요소는 단 하나도 없는 유기농의 시들은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이라면 모두가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신선한 양분을 공급했다. 이해인의 시는 위로이자 기도였다.

이해인 수녀가 시인으로 살아온 43년 세월을 되돌아보며 펴낸 은 그녀의 인생 절반을 뚝 떼어 온전히 담고 있다. 단순히 활자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을 한평생 굽어보고 사랑해온 애정과 가난하고 아픈 이들을 위한 위로가 다시 살아난다. 삶을 살아내기에도 팍팍하고 고된 이 세상에 시가 여전히 존재해야 될 이유를 이해인은 자신의 삶과 시로 말하고 있다.

시로 세상을 위로해온 43년

내년이면 이해인 수녀는 고희를 맞는다. 나라가 해방되던 해인 1945년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났다. 신의 부르심이자 사명을 받아 열아홉 나이에 수녀가 되었듯 시인이 된 것도 어찌 보면 그랬다. 사람들을 사랑하고 위로하라는 사명이었을 것이다. 가톨릭 잡지 에 동시 ‘하늘’을 발표한 것이 1970년의 일이니 시인으로 살아온 나이만 헤아려도 불혹을 넘긴 셈이다. 시인의 나이로만 어느덧 중년일 텐데도 이해인의 시는 좀처럼 늙지를 않는다. 1976년 첫 시집 를 발간한 이후 2011년 를 내기까지 책으로는 열 권, 편수로는 1천여 편을 훌쩍 넘기는 동안 이해인은 언제나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을 노래하며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했다. 시는 곧 이해인의 삶이다. 에는 맑은 감성이 담긴 시 8백여 편과 함께 어린 시절부터 최근까지 이해인의 모습이 담긴 사진 60여 장도 실려 있다.

“전집을 내려고 제가 쓴 시를 세어봤더니 1백 편도 넘더라고요. 동시집, 기도 시집에 묶인 시나 산문집에 섞인 시를 빼고는 모두 전집에 담았습니다.”

문학인으로 자신의 이름을 내건 전집이 나온다는 것은 문학적 성취와 대중에게 받은 사랑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일이다. 자신의 인생과 시인으로서의 삶을 정리하는 길목에서 이해인은 또다시 마음을 다잡는다.

“처음 시전집을 낸다고 했을 때 당혹스러웠어요. 훌륭한 시인이라거나 문학적 평가를 받는 시인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으니까요. 그런데도 많은 사랑을 받았어요. 저만큼 독자들로부터 사랑받은 시인이 있을까요. 받은 사랑을 돌려주려면 더 희생적이고 봉사의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사람들을 위한 천사 노릇을 감당해야겠다는 생각을 해요.”

이해인의 시는 신앙과 서정이 조화를 이루며 우리를 위로했다. 그녀의 시를 읽었던 아이가 어른이 되어 아들을 낳았고, 그 아들이 다시 이해인의 시를 보며 자라 또 아들을 낳을 때까지 함께했다는 독자의 고백은 이해인이 지금까지 시를 쓰는 이유다.

2백여 편의 시를 덜어내고도 전집 두 권을 꽉 채울 만큼 이해인은 시를 쓰고 또 썼다. 1천여 편의 시를 만들기 위해 매년 23~24편의 시를 발표했다는 이야기다. 발표한 시가 1천여 편이니 속으로 삭이고 가슴에만 묻어둔 시도 족히 수백여 편을 넘겼을 것이다. 그처럼 왕성한 창작 활동이 가능했던 이유는 시가 이해인에게 고통스러운 창작이 아닌 자연스러운 기도이자 대화였기 때문이다. 스스로는 ‘모태 신앙이 낳아준 순결한 동심’이 수십 년 동안 시를 써온 원동력이라고 말한다.

“시는 제게 기도이자 노래예요.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읊어주는 편지이고 또 러브 레터죠. 더 많은 사람들이 시를 읽고 행복해지는 세상이 될 때까지 작은 몫이라도 기여하고 싶어요.”

이해인은 손바닥만 한 작은 수첩을 수녀복 주머니에 항상 가지고 다닌다. 그리고 시상이 떠오를 때마다 이 수첩에 적어둔다. 시의 대상이 되는 것들은 특별하지 않다.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 그래서 하찮다고 평가받는 것들도 이해인을 만나면 사랑과 희망의 전령사가 된다. 평범해서 소중하다고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에 다정한 눈길을 주고 따뜻하게 쓸어주는 것이 이해인의 시다.

“아무리 바쁜 날도 수첩을 놓는 일은 없어요. 잡다한 생각들까지 모두 적어놓아요. 떨어진 꽃잎, 아침에 울던 까치, 수녀원에 다녀가신 손님들에 대한 생각들을 반쪽씩, 한 쪽씩 적어두었다가 여유가 생기는 날에 시로 옮깁니다.”

그녀의 시는 쉽고 정갈하다. 또한 누구나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쉽고 보편적인 언어로 엮은 시는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의미가 퇴색한 거친 언어들이 세상을 뒤덮는 세상에서 이해인의 시는 그 존재 자체로 위로가 됐다. 아이러니하게도 시가 사랑받을수록 이해인의 고민은 깊어졌다.

“책 좀 안 팔리게 해달라고 얼마나 기도했는지 몰라요. 더 좋은 시도 많은데 말이죠. 시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파생된 유명세도 있었고요. 이러다 수도 생활을 망치면 어쩌나 걱정도 많이 했어요. 베스트셀러가 어느 날 스테디셀러로 넘어가면서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지요.”

누구나 조금이라도 더 유명해지고, 조금이라도 더 성공하기 위해 발버둥 칠 때 책 좀 안 팔리게 해달라던 이해인의 기도는 참 특별하고 순수하다. 그 기도가 성공한 누군가의 배부른 투정으로 들리지 않는 이유는 이해인이 시로 거둔 그 무엇도 손에 쥐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로 사람들을 위로하고 그로 인해 얻게 된 부는 모두와 함께 나눈다.

“타인에게 받은 사랑을 되돌려주기 위해 희생하고, 그들의 아픔을 들어주고 싶어요. 인세는 사적으로 쓰지 않습니다. 제 통장을 본 적도 없고 볼 수도 없어요. 모두 수도원에서 관리하는데 제가 죽으면 재단 법인으로 들어갈 예정이에요. 지금 제가 가지고 있는 것은 주민등록증밖에 없어요. 교통비조차 수도원 경리과에서 신청해서 타 쓰고 있습니다. 수도자의 삶은 그런 것이 아닐까요.”

이제는 원치 않았던 유명세도 편안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생겼지만 여전히 그 유명세 덕에 웃지 못할 일들이 생긴다. 그녀가 쓰지 않은 시에 버젓이 이해인의 이름이 붙어 여러 사람에게 퍼져 있다. 이해인이라는 KS 마크가 찍힌 작자 미상의 시들은 수십 편에 이른다. 그조차도 시인은 웃어넘긴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제가 쓰지 않은 시 앞에 제 이름이 붙어 있어요. 40여 편 되는 것 같아요. 얼마나 시를 좋아하면 내 이름을 붙일까. 그런 생각을 하면 다 용서하게 돼요.”

대장암 투병 중, 명랑하게 싸우고 있다

여전히 소녀의 얼굴이다. 언제나 편안하고 따뜻한 분위기가 이해인의 곁을 감싸고 있다. 얼굴만 보면 아픈 사람이라고 짐작할 수 없을 정도지만 현재 시인은 대장암 투병 중이다. 2008년 진단을 받았고 5년째 암과 싸우고 있다. 그 치열한 사투 가운데에서도 마음의 평안을 찾을 수 있는 남다른 경지가 느껴졌다.

“항암 주사만 30번을 맞았죠. 방사선 치료도 28번 했는데 그렇게 고생하며 투병 중인 사람 같지 않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요. 예전부터 암에 걸리면 명랑하게 투병하겠다고 생각해왔기 때문에 본보기가 되려고 합니다. ‘기쁘게 아프자’, ‘기쁘게 싸우자’ 마음먹고 있어요. 암세포와 ‘조금만 더 살게 해달라’고 대화하니 암세포가 참아주는 것 같아요.”

커다란 병 앞에서도 웃음으로 대처하는 시인의 자세가 보는 이의 마음을 울린다. 현재 이해인 수녀는 완치되지 않은 상태다. 최근에는 결장에서 또 다른 혹이 발견되기도 했다. 고된 항암 치료를 받으면 신을 원망할 법도 하고 시를 놓을 것 같기도 한데 시인 이해인의 꾸준한 발걸음에 족쇄를 채우지는 못했다. 오히려 시를 쓰는 횟수가 더 늘었다. 시상을 적어두는 작은 수첩에 빼곡히 시감들이 쌓여간다. 만남과 이별에 대한 생각이 많아졌다. 아직 발표하지 않은 시가 30편 정도 있다.

“아프니까 시를 더 쓰게 돼요. 암 투병을 시작한 뒤에 시가 더 깊어졌다는 평을 많이 듣게 됐어요. 독자로부터 ‘아픈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국민 이모 수녀님’이라는 새로운 별명도 얻었죠. 건강한 사람들이 건성으로 뱉는 말이 아픈 사람들에게 어떻게 눈물이 되는지 표현하고 싶어요. 담백하지만 묵상이 될 수 있는 시를 쓰고 싶습니다.”

여느 때처럼 시를 쓰고 기도하며 살아가고 있지만 최근에는 조금 특별한 글을 하나 썼다. 유언장을 작성한 것이다.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으로 유언장을 작성하게 됐지만 최근 연달아 주변 지인들을 떠나보내면서 한 번쯤 마음을 정리하고 다시 시작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란다.

“장례는 문인이 아닌 수녀로서 다른 수녀들과 똑같이 극히 간소하게 해달라고 썼어요. 이번 전집을 포함한 제 저작물의 사후 인세는 현재와 마찬가지로 모두 제가 속한 성 베네딕도 수녀회로 귀속될 예정이고요. 이승 정리가 다 끝나니 이제 저쪽 세상으로 이사 갈 날만 남았구나 싶어 홀가분합니다.”

박완서와 최인호를 떠나보내며

“제가 수녀님을 알고 지낸 지 몇 년이나 되었나 새삼스럽게 꼽아보니 어쩔 수 없이 그 힘들었던 1988년이 기점이 되는군요. 1988년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아’ 소리가 나올 적이 있을 만큼 아직도 생생하고 예리하게 가슴이 아픕니다. 그러나 수녀님이 가까이 계시어 분도수녀원으로 저를 인도해주신 것은 그래도 살아보라는 하느님의 뜻이 아니었을까 늘 생각하고 있습니다.”

2011년 세상을 떠난 작가 박완서가 2005년 강원도 속초의 호텔에 머물며 이해인 수녀에게 보낸 편지 일부다. 이해인 수녀와 박완서 작가는 마음을 나눌 수 있는 문학적 동지였다. 나이는 박완서 작가가 14살 위였지만 둘 사이에 숫자는 문제 되지 않았다. 같은 길을 걸어가는 동료이자 서로의 아픔을 치유하는 치료제였다. 마음속에 고통이 찾아오거나 고민이 있을 때면 서로 ‘고해 성사’를 했다. 가톨릭 신자인 박완서와 수녀 이해인은 ‘고해 성사’라는 형식을 빌려 깊은 곳에 숨겨둔 마음까지 나누는 사이였다. 박완서 작가는 이해인 수녀에게 남긴 또 다른 편지에서 그녀를 고향의 당산나무에 비유했다. 열심히 내 눈앞에 놓인 길을 걷다가도 문득 생각이 나고 마음이 편해지는 사람이었다는 표현일 것이다.

암 투병을 시작한 것은 이해인 수녀가 먼저였다. 박완서 작가는 틈날 때마다 이해인 수녀의 안부를 물으며 건강 상태를 염려했다. 박완서 작가가 2010년 담낭암 진단을 받기 직전 암 투병 중인 이해인 수녀를 갑자기 찾아가 그저 말없이 손을 쓸어주고 위로의 온기를 전했다. 대장암에 좋다는 음식을 사주고 수녀원 사람들에게도 짜장면을 산 그였다. 인간적이고 소박한 정을 나누었던 만큼 박완서 작가의 타계 소식은 이해인 수녀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해인 수녀는 2011년 1월 빈소를 찾아 “멘토를 잃었다”고 깊은 상실감을 드러냈다.

마음속 빈자리를 채 다독일 여유도 없이 또 한 사람의 동료가 이해인의 곁을 떠나갔다. ‘영원한 청년 작가’ 최인호다. 두 사람은 1945년생 동갑내기이자 가톨릭 신자라는 점까지 비슷했다. 최인호는 침샘암 투병 중 2013년 9월에 세상을 떠났다.

최인호는 암 투병 기간에 집필한 에세이집 에서 이해인에 대해 ‘영원히 나이를 먹지 않는 소녀’라고 썼다. 종교의 고귀함을 알고서도 인연이 닿지 않아 가까이하지 않던 시절, 이해인은 최인호가 알고 있는 유일한 성직자였다. 또 시집을 통해 발견한 샘물처럼 맑은 영혼이었다. 그런 최인호에게 이해인도 의지가 되어주고 힘을 주려고 했다. 1985년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이해인은 같은 시대를 살아온 친구를 위해 저녁 기도 때마다 최인호라는 이름을 떠올리겠다고 약속했다. 영원한 청년 작가와 영원히 늙지 않는 소녀 시인은 2008년 나란히 암 진단을 받은 얄궂은 운명까지 함께했다. 최인호가 먼저 세상을 떠났지만 이해인은 여전히 저녁 기도 시간에 그의 이름을 떠올리며 기도를 할 것만 같다.

마음을 치유하는 넉넉한 국민 이모의 품

이해인은 시인의 필명이다. 본명은 이명숙. 부산 광안리 앞바다를 바라보다 지었다는 해인이라는 필명은 바다 해(海)를 넣고, 수도자의 모습은 어진 덕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어질 인(仁)을 붙여 지었다. 세례명 클라우디아는 라틴어로 보호자라는 뜻이다. 그래서일까, 그녀의 시를 읽는 이들은 모두 바다처럼 넓은 품을 느끼고 보호받는 따뜻함을 체험한다.

“그동안 민들레 영토 수녀님, 하얀 구름 수녀님으로 불렸는데 최근에는 ‘국민 이모 수녀님’이란 호칭을 얻었어요. 주위 사람들에게 털어놓지 못하는 얘기를 들어줄 수 있는 ‘국민 이모’라는 호칭이 가장 마음에 듭니다.”

지금까지 이해인 시집의 판매 부수는 어림잡아 계산해도 5백만 권이 넘는다. 시를 접한 이들의 수가 적어도 5백만 명은 넘는다는 이야기가 된다. 더욱더 다행인 점은 이해인의 시가 일방적인 전달에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시를 읽고 편지와 엽서, 때로는 이메일로 고민과 마음을 전해온 독자들 덕분에 이해인의 시는 소통했고 생명력을 얻었다. 이해인 수녀도 독자들의 편지를 무엇보다 아낀다. 현재 이해인 수녀가 있는 성 베네딕도 수녀원에 편지만 모아놓은 창고가 있을 정도다. 이 창고에 쌓인 위로와 감사의 마음이 수만 통을 넘는다.

“테레사 수녀님처럼 빈민촌을 돌아다니진 못해도 시 한 편으로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어서 행복합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시를 읽었으면 좋겠어요.”

그 바람은 더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느끼며 평안을 얻고 사랑을 나누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이해인은 최근 한국 사회의 굵직한 사건들에 대해서도 안타까운 마음을 전했다.

“장성택 전 북한 국방위 부위원장이 총살당했다는 뉴스를 보고 잠을 이루지 못했어요. 아버지가 어린 시절 북한으로 납치된 것도 떠올랐죠. 시베리아 같은 추위 때문에 잠을 못 잤어요. 이렇게 폭력이 난무하는 시대에 우리는 시를 읽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해인 수녀는 암 투병 중에도 여전히 시를 쓴다. 시가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어주길 바라는 마음이 크다.

“자기계발서나 다른 나라 작가들 작품보다는 한국 시인들의 작품을 읽어줬으면 좋겠어요. 그러면 이웃을 더 용서하는 사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는 하나의 기도이자 노래고, 위로이자 편지니까요.”

[- 더 많은 기사는 여성조선 1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