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르겐 하버마스 교수와 한상진 교수의 대담은 지난 11월 23일 독일 슈타른베르크 하버마스 교수의 자택에서 7시간 동안 이어졌다. 오후 1시에 시작된 대담은 오후 8시가 돼서야 끝났다. 오랜 기간 학문적 우정을 다져온 두 사람은 종교와 보편적 가치 문제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토론을 나눴다. 다음은 남북문제에 관한 대담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대담 전문은 chosun.com).

한상진 교수(이하 한)

"선생께서는 1996년 한국을 찾아 서울대를 비롯해 대구, 광주 등에서 7회의 공개강연과 토론을 했습니다. 선생은 당시 한반도 상황을 다루면서 독일이 택한 급속한 통일의 긴 그림자를 잘 살피기를 권유했는데요."

하버마스 교수(이하 하)

"나는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이 강제 없는 토론과 집회·결사를 통하여 합의를 이루어가는 과정을 중시합니다. 어떤 주장이나 집단도 배제돼서는 안 되죠. 완전히 개방적이고 포용적인 소통 절차 안에서 국민주권이 살아 움직입니다. 민족통일은 새로운 정치 공동체를 만드는 과정이기에 나는 이런 관점에서 통일 문제를 조명했습니다. 통일되던 당시 동독은 종주국(소련)으로부터 보호막이 끊긴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북한의 배후에는 중국이 있어요. 북한은 나름대로 독립국가를 지향했으나 동독은 한 번도 독립국가를 추구한 적이 없습니다. 이런 배경에서 통일의 기회가 왔을 때 헬무트 콜 수상은 전광석화처럼 동·서독의 통합을 추진했습니다.그렇지만 나는 소통의 관점에서 통일 과정에 문제가 많다고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급속한 통일에 환호했지만 나는 부작용을 걱정했습니다."

"특히 어떤 부작용을 걱정했습니까?"

"경제 문제도 있었지만 좀 더 중요한 것은 정치사회적 문제였습니다. 독일 통일은 시민이 자기 결정의 주체가 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오직 피상적인 방식으로 동독을 서독의 틀에 동화시키는 길을 택했으니까요. 스탈린 체제하에서 동독 주민이 40년 이상 경험했던 삶의 변화는 우리가 가정했던 것보다 더 철저하고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이 주민들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경험을 점검하고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시간과 기회가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없었습니다. 그 결과 동독 지역에는 오늘날 정치적 우경화의 잠재력이 적지 않은데 이것은 소통 결핍의 산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위르겐 하버마스(오른쪽) 프랑크푸르트대학 명예교수가 지난 11월 23일 독일 슈타른베르크의 자택에서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와 한반도 통일 문제를 주제로 대담을 하고 있다.

"북한은 동독과 비교해서 어떤 차이가 큰 것처럼 보였습니까?"

"두 가지 점에서 달랐습니다. 첫째는 북한 정권의 성격입니다. 북한은 스탈린 체제 이후 나름대로 합리화되고 있던 동구 권위주의 정권보다도 훨씬 더 자유주의 체제로부터 멀리 떨어진 정권입니다. 둘째는 분단 이후 북한의 변화는 동독보다 더 심층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나는 동독 주민이 일상생활, 문화 습관, 사회화 등에 걸쳐 새롭게 적응하는 데 좀 더 많은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보았습니다. 그런데 통일을 앞두고 생각할 때 북한은 더 그렇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이런 가정하에 나는 점진적인 통일을 선호했고 독일식 경로를 밟지 말라고 제안했습니다."

"통일 전망에 관하여 한국과 독일의 큰 차이는 무엇입니까?"

"통일을 이끄는 동력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뚜렷해지는 것은 북한 정권을 상대로 남한 정부가 관계 개선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점입니다. 현상 타파의 힘이 한반도 내부보다 외부에 있고 특히 미국과 중국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환경에서는 한국 정부가 구사할 수 있는 선택의 범위는 제한됩니다. 북한을 아예 버리든지 남한에 진정한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는 것으로 만족할 수는 있겠죠. 또는 미국과 연합한 일종의 군사적 대응을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 가능성은 내가 어떤 예측도 하기 힘듭니다."

"통일이 가져온 긍정적 결과에 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통일 이후 20여년간 독일이 '정상적'인 민주국가로 행동할 수 있는 자의식과 지평이 훨씬 강해졌다는 점입니다. 좋은 점은 동독 안에서 민족주의 성향이 있는 우파를 포함하여 각 계층, 세대를 포함한 전체 인구의 정치적 사고방식이 대체로 자유주의 방향으로 형성되고 있다는 점입니다. 민주적 정치 공동체의 형성이 통일로 인해 장애를 받지 않고, 동독을 통합하는 과정에서 계속 전진한 것은 획기적 의미를 갖습니다. "

"현재 남북 간에는 선생님께서 강조하신 소통의 상보성 원칙이 지켜지지 않습니다. 우선 경제 교류와 협력을 다시 생각해보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경제협력 모델은 한반도 미래의 한 면에 불과합니다. 북한의 민주주의 전망을 고려하지 않은 채 값싼 노동력을 활용하고 기술을 투입하여 경제적 붐을 조성하려는 실용적 접근은 턱없이 부족해 보입니다. 남북한 주민은 같은 민족이고, 같은 역사와 문화를 공유한 사람들입니다. 내가 주목하는 것은 자유로운 시민이 아무런 강제 없이 자신의 미래를 이끄는 집합 의지를 형성해가는 민주적 절차입니다."

"선생의 단호한 입장 표명은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좀 더 근본적인 접근을 생각하시는 것 같군요?"

"나는 한국인이 자의식을 가지고 동아시아 전체로 역할을 확대할 수 있지 않을까 가정합니다. 유럽의 나치 체제와는 다르지만 이보다 결코 위험이 적다고 할 수는 없는 민족주의 감정이 오늘날 동아시아를 휘젓고 있으니까요. 내가 한국에 기대하는 것은 군사적 대응을 넘어 시민사회의 선도력으로 갈등이 고조되는 동아시아에 소통과 협력을 증진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너무 중요한 말씀이어서 다시 한 번 설명을 부탁합니다."

"서독이 그랬듯이 한국은 능란한 솜씨로 외교 정책을 세워야 합니다. 한국이 북한과 교류하고 화해하는 것이 주변 강국의 이해와도 일치한다는 점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한국은 20세기 낡은 정치의 틀을 벗어던져야 합니다. 내가 만일 한국인이라면 새로운 아시아의 눈으로 경제적 상호 이익과 민주주의 가치를 향해 미국, 중국, 일본의 협력을 중재하는 역할을 하고 싶을 것입니다."

"오늘 대담에서 고무적인 것은 한국의 잠재력에 대한 선생님의 진단입니다."

"일본도 2차 대전 이후 민주주의와 경제성장을 이뤘지만, 자기 확신에 찬 우익이 강합니다. 반대로 한국은 지식정보 혁명과 함께 새로운 미디어가 이끄는 역동적 시민사회가 형성되고 있어요. 역사에 대한 자기 성찰이 가장 활발히 일어나고 있습니다. 과거를 반면교사로 삼아 새로운 미래를 추구하려는 힘이 여기서 나오기 마련입니다. 한국에는 이런 미래지향적 요구가 강합니다."

하버마스, 이념·학파 넘어 '살아 있는 고전'으로 불려
한상진, 민주당 대선평가위원장 지낸 진보 사회학자

위르겐 하버마스(85세) 독일 프랑크푸르트대 명예교수는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석학으로 불린다. 1960년대 비판이론의 상속자로 명성을 날렸다. 그 뒤 수많은 학문 논쟁을 주도하면서 영미 자유주의, 실용주의, 언어이론을 수용하고 좌파의 경직성을 과감히 탈피하면서 이념·학파·국경을 넘어 ‘살아 있는 고전(古典)’의 지위를 확보했다. 현대 자본주의 시장경제, 복지국가, 패권적 세계주의의 한계를 예리하게 분석하면서 인류의 미래를 소통이론으로 열고자 노력해왔다. 특히 그의 ‘소통정의’와 ‘소통민주주의’ 개념은 좌우 대립을 넘어 국내·국제정치의 지향점으로 폭넓은 공감을 얻고 있다.

지난해 1월 네덜란드 프라미움 에라미아눔 재단은 그에게 에라스무스 상을 시상하면서 “하버마스 교수는 지난 50년 동안 사회학과 철학, 정치학 분야의 지도적인 사상가였으며, 정치를 예리하게 비판적으로 분석했다”고 했다.

한상진(68) 서울대 명예교수는 서울대 학사와 석사를 거쳐 미국 남일리노이대에서 푸코와 하버마스 이론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시절 사회변동 주체를 설명하는 중민이론을 주창한 대표적 진보 사회학자다. 김대중 정부 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원장, 대통령정책기획위원장을 지냈다. 2012년 대선 후에는 민주당의 대선평가위원장으로 활동했다.

[한상진 교수의 대담 後記] 하버마스, 17년前 訪韓때 사진 보며 해인사·光州 떠올려

하버마스 선생을 만나기 위해 독일로 가는 나의 마음은 설레었다. 이번 대화의 주제는 17년 전 그의 서울대 강의 주제, 민족통일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선생은 당시 보름간 한국에 체류하면서 7회의 공개강연과 토론을 했다. 서울·대구·광주 등 어디서나 구름 같은 인파가 몰렸다. 선생은 한국에 한 번밖에 오지 않았지만 각별한 애정을 간직하고 있다.

나는 하버마스 선생의 성실함과 솔직함에 큰 감동을 받았다. 선생은 모르는 것은 모른다 하고, 동의하지 않는 것과는 분명히 선을 그었다. 또한 자주 질문을 했다. 그는 한 번도 적당히 넘어가지 않았다. 반복해서 자신을 분명하게 표현하기 위해 애썼다. 나이가 들면서 정확한 용어를 찾기가 힘들다는 고백도 했다.

대담이 끝나고 우리는 부인이 찾아 놓은 17년 전의 사진 앨범을 보면서 환담을 나누었다. 선생은 특히 해인사와 광주의 기억이 생생했다. 한국처럼 짧은 기간에 자신을 꽉 짜서 진을 빼게 한 적은 없었다고 말했다. 선생은 더 젊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질문에 응답하고 보완을 거듭하는 정력적인 모습을 보였다. 선생은 한국에 대한 지식이 약해 구체적인 정책을 제안하는 것은 자신의 일이 아니라고 했다. 그러나 자신의 이론적·철학적 입장에서 한국의 미래에 대해 하고 싶은 말은 했다고 술회했다.

다음에는 이런 대담의 부담 없이 순수한 친구의 자격으로 언제든지 오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