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 주인공으로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은 피터 오툴(81·사진)이 15일(현지 시각) 영국 런던의 한 병원에서 별세했다.

1932년 아일랜드 출판업자의 아들로 태어난 오툴은 영국 북부에서 자랐다. 13세에 학교를 그만두고 창고지기와 사진가 조수 등을 하다가 '요크셔 이브닝 뉴스'의 기자로 일했다. 하지만 편집장으로부터 "다른 걸 해봐, 배우 같은 거"라는 말을 듣고 해고당한 뒤 왕립연극아카데미에 입학했다. 연극계에서 '차세대 로렌스 올리비에'란 별명을 얻은 그는 1960년 '납치'로 스크린에 데뷔했고, 1962년 세계인의 마음속에 각인된 중대한 역할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로렌스를 맡았다.

사막의 깨끗함을 사랑하고, 아랍인들의 영광을 진심으로 원했던 이상주의적 로맨티시스트. 188㎝의 장신으로 열차 위를 건너뛰거나 바람이 부는 사막에서 밤을 꼬박 새우고 홀로 "아카바, 아카바, 사막을 건너서!"라고 결단하며 뿜어내는 그의 카리스마에 세계는 매혹당했다. 이후에도 '겨울의 사자'의 헨리2세,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 등 귀족이나 왕 역할을 주로 맡았다.

오툴은 자신의 연기 과정을 "'마법'과 '땀'을 섞는 것"이라고 했다.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2년간 촬영하면서 그는 베두인 텐트에서 자고, 아랍어와 낙타 타는 법을 배우며 베두인 문화를 익혔다. 오툴은 "나는 매우 육체적인 연기자"라며 "나는 모든 것을 사용한다, 발가락, 이, 귀 등 모든 것"이라고 했을 정도다.

단숨에 스타가 된 후 오툴은 한동안 방만하게 살았다. '닥터 지바고'의 오마 샤리프와 함께 베이루트와 카사블랑카의 카지노에서 돈을 탕진했고, 70년대에는 알코올중독과 위암을 겪기도 했다.

상복은 별로 없었다. 아카데미상 후보에 여덟 차례 올랐지만 '상을 한 번도 받지 못한 최다 지명자'로 꼽히기도 했다. 2003년 아카데미가 그에게 평생공로상을 줬을 때 이런 수상 소감을 남겼다. "내 처지는 언제나 신부 들러리(bridesmaid)였지, 신부(bride)였던 적은 없다. 나는 이제 죽음이 우릴 갈라놓을 때까지 함께할 나만의 오스카를 갖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