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일 오후 서울 성수동 신도리코 본사 SDNA 전시장. 사무용 기기 전문업체인 신도리코가 독자 브랜드인 신도(Sindoh)로 세계시장을 공략하겠다는 의지를 밝히기 위해 새 CI(Corporate Identity·기업 이미지)를 공개하는 자리에서 영국 디자인 컨설팅 기업인 탠저린(Tangerine)의 마틴 다비셔(Darbyshire·52) 대표와 건축가 민현식(67) 기오헌 대표가 만났다.

다비셔 대표는 산업디자인 부문에서 30년에 가까운 경력을 갖고 있는 베테랑 디자이너다. 1989년 그가 런던에 설립한 탠저린은 세계 최초로 브리티시항공(BA)의 비행기 비즈니스 클래스 전체에 '완전히 수평으로 누울 수 있도록 좌석을 마주보게 배치하는 디자인'을 선보이면서 산업디자인 분야에서 자타가 인정하는 글로벌 넘버원 기업으로 우뚝 섰다. BA는 '수평 좌석'을 설치한 2000년 첫해에만 2억파운드(약 3500억원)를 웃도는 이익을 얻고 시장점유율 9%를 넘겼다. 지금도 침대형 좌석은 BA의 수익을 꾸준히 올리는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그 밖에 시스코와 도요타·니콘·캐논·도시바·삼성·LG 등 전 세계 50여개국 기업들을 컨설팅해왔고, 현재 맡은 기업 고객만 20여개에 이른다. 아이팟·아이폰을 디자인한 조너선 아이브 애플 수석부사장도 탠저린 출신이다.

지난 19일 서울 신도리코 본사 SDNA 전시장에서 마틴 다비셔(왼쪽) 탠저린 대표와 민현식 기오헌 대표가 대담하고 있다. 다비셔 대표는 “요즘 소비자는 눈앞의 상품을 쥐었을 때 다른 제품에서 느낄 수 없는 자신만의 경험을 느낄 수 있어야 지갑을 연다”고 했다.

다비셔 대표가 이날 신도리코를 찾은 이유는 2008년부터 탠저린이 신도리코의 사무용 복합기기들 디자인을 컨설팅해왔고, 이날 선보인 새 CI도 그의 작품이기 때문. 그와 마주앉은 민현식 대표 또한 신도리코 아산공장의 기숙사 설계를 시작으로 20여년간 신도리코의 건축을 맡아왔다. 신도리코 서울본사와 아산공장, 중국 칭다오 공장이 민 대표의 대표작이다.

디자인과 건축을 각각 대표하는 두 거장이 신도리코를 공통분모 삼아 한자리서 만난 까닭은 자신들에게 영향을 주는 디자인 철학과 창조 활동의 원칙을 공유함으로써 20세기에 중요하다고 여겨진 성과와 혁신을 넘어 21세기 디자인이 추구해야 할 사회적 가치를 어떻게 창출할지에 대해 의견을 나누기 위해서였다. 국적도, 나이도, 분야도 다르지만 디자인의 본질을 꿰뚫는 두 사람의 생각은 묘하게 맞물리는 데가 있었다.

다비셔 대표는 "디자인은 소비자를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동시에 부(富)를 창출하는 수단이므로 잘 팔리는 상품을 만들어 돈을 벌어야 한다"면서 "디자인이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디자이너 자신과 해당 기업의 대표, 소비자가 똑바로 알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에 제가 만든 신도의 CI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삼각형의 뫼비우스 로고'예요. 3차원적 공간과 세 개의 방향성이 앞으로 신도가 어느 면에서든 실수를 허용치 않겠다는 의지, 해외시장을 적극 개척하겠다는 의지, 자신있되 오만하지 않은 단순함을 보여주지요."

그동안 신도리코는 프린터를 연간 3억달러 이상 수출하는 회사였다. 하지만 회사가 만든 제품은 대부분 리코나 제록스 등 해외 유명 프린터 업체의 상표를 달고 팔려나갔다. 이번 CI는 향후 독자 브랜드 제품의 영업을 본격화한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다비셔 대표는 "2년 전 개발한 신도리코 사무용 복합기기는 신도리코 엔지니어·경영진과 3년간 작업하며 고객의 요구를 분석한 결과다. BA의 비즈니스 클래스 좌석은 직원 3명이 비행기를 타고 동영상, 필기, 사진을 통해 고객의 행동을 비행 내내 기록한 것"이라며 "호기심을 갖고 남과 다른 걸 찾기 위해 해변의 돌을 일일이 뒤집어보는 것, 그것이 디자이너가 첫째로 손에 쥐어야 할 주요 도구"라고 했다.

민 대표는 다비셔 대표의 견해에 '비움의 구축'을 더했다. "시각적으로 예쁘게 만들어 사람들을 즐겁게 하는 게 건축이라 여겼어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건축이 시각적 아름다움의 대상인가를 의심하게 됐어요. 거실에선 TV만 보고, 침실에선 잠만 자야 하나요?"

그는 "내가 지은 건물 앞에 낙엽이 떨어져 있는 풍경 사진을 보고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내가 만든 건물이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게 아니라 그 건물 주변의 환경과 그걸 쓰는 사람들에게서 새로운 아름다움이 솟아나오더라"며 "그런 걸 보면 디자이너와 건축가는 기본틀에 사용자가 끊임없이 변화를 줄 수 있는 잠재력만 만들어주면 되는 게 아닌가 싶다"고 덧붙였다.

분야도, 국적도 다르지만 두 사람은 컴퓨터로 모든 걸 손쉽게 해결하려는 젊은 디자이너들의 자세에 대해 우려를 표했다. 다비셔 대표는 "요새 디자이너들은 컴퓨터로 그림을 그리는데 나는 손으로 스케치를 한다"며 "내 마음 안에서 북적이는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끄집어내려면 손을 움직일 수밖에 없다"고 했다. 민 대표도 "연필 들고 끼적이는 걸 좋아해서 책 읽을 땐 여백에 메모를 한다"며 "이런 습관은 읽는 짓과 손을 놀리는 짓을 동시에 해서 책을 몸에 새겨두기 위함이다. 이 흔적들의 축적이 내 사유의 축적이며 내 건축의 시작"이라고 했다. "시간을 초월한 건축 창조의 원칙은 인간 그 자체이고, 그래서 건축은 공학 또는 예술이라기보다 오히려 인문학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