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3년 과천 국립 현대미술관에서 열렸던 '휘트니 비엔날레 서울'전은 국내 미술 전시회 중 '기획력이 가장 돋보였던 전시'로 꼽힌다. 작년 김달진미술연구소가 국내 미술평론가·큐레이터들을 설문 조사한 결과다. 사실 여기서 "기획력이 돋보였다"는 말엔 어폐가 있다. '휘트니 서울'전은 우리 현대미술관의 기획이라기보다는 100% 미국 뉴욕 휘트니미술관 전시를 옮겨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휘트니미술관은 2년마다 젊은 미술가들의 실험성 강한 작품들을 모아 전시회를 여는데, 그해 출품작들 중엔 유난히 도발적인 것들이 많아 미국에서도 논란이 뜨거웠다.
이 작품들을 서울로 가져와 보여주자고 발벗고 나선 이는 비디오 아티스트 고 백남준씨였다. "우리 청년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주려는 게 아니다. 어떤 음식이나 깨트려 먹는 강한 이빨을 주려는 것이다."
관람객들은 책에서나 보던 현대미술의 실상을 눈으로 직접 보며 "이게 과연 미술인가" 했다. 찰스 레이라는 작가는 부모와 아이 등 4명 한 가족이 성기를 드러내고 벌거벗은 채 서 있는 입체 작품을 선보였다. 동성연애, 에이즈, 마약, 인종차별, 제국주의 같은 터부시돼왔던 주제들이 거침없이 다뤄졌다.
"가장 미국적인 전시를 왜 여기서 돈 들여가며 하느냐"며 차가웠던 미술인들이나 시민들 반응이 달라졌다. 교통도 불편한 과천 산골짝 현대미술관에 한 달 남짓 동안 16만명의 인파가 몰렸다. 현대미술의 최전선에서 날아온 '날것'을 직접 먹어본 문화 풍토에서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젊은 미술인들이 많이 자라났다.
하나의 제대로 된 전시회는 하나의 시대를 열 수 있다. 많은 사람이 2013년 경복궁 옆 새 현대미술관 개관과 그 기념전을 기다려온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이제는 우리도 우리 힘으로 이거다 싶은 현대미술 전시회를 기획할 만하지 않은가. 과천이 아니라 서울의 심장부에서 처음으로 이런 전시를 볼 수 있게 됐기에 기대는 더 컸다.
막상 뚜껑을 여니 먼저 삐져나온 것이 전시 작가 선정을 둘러싼 미술계 불협화음이다. 개관 기념전 중 하나인 '시대정신'전에 선정된 작가 38명 중 27명이 현대미술관장과 이 전시회 기획자가 재직 중인 대학 출신이란 게 불씨가 됐다. 축제가 돼야 할 현대미술관 개관전 앞마당에서 수백 명의 미술인이 어깨띠 두르고 주먹 쥔 손을 흔드는 풍경이 보기 민망했다. 사실 미술 전시에서 미술관이나 큐레이터의 권한은 존중돼야 하고 작가들 안배보다 중요한 것은 전시의 질이다. 그렇다고 이번 개관전들이 한국 현대미술의 비전과 방향을 제시했다고 박수 치는 사람이 많아 보이는 것도 아니다. 작품 자체가 화제가 되거나 칭찬 또는 비난 대상이 되는 경우도 잘 들리지 않는다.
1930년 무렵 뉴욕 현대미술관(MoMA)이나 휘트니미술관 개관은 미국 현대미술의 독립선언과 같은 것이었다. 미국의 한 평론가는 "뉴욕은 휘트니 비엔날레를 꺼리지만 한 해 걸러 열리는 이 전시가 없다면 세상은 훨씬 지루한 곳이 됐을 것"이라고 했다. 새 현대미술관이 우리 시대 온갖 창조적 도발적 상상력의 발신 기지가 돼 이를 통해 온 미술계가 들썩이고 문화 전체가 왁자지껄해지는 모습은 상상만 해도 즐겁다. 미술관을 움직이는 사람들의 자세와 역량이 바뀐 미술관의 위상만큼 달라진다면 이런 꿈이 이뤄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