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고문

일본은 1년 전 당시 이명박 대통령이 일왕의 사과를 요구한 것을 문제 삼아 한·일 관계를 극단적으로 몰고 가고 있다. 또 한국이 일본 문제를 한·일 간에 국한하지 않고 대외(對外)적으로 끌고 가 일본을 국제적으로 망신 주려 하고 있다고 역정을 내고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일왕의 사과를 요구했던 상황의 전말은 이렇다. 그는 2012년 8월 14일 한국 교원대에서 열린 한 워크숍을 방문한 자리에서 일왕 방한과 관련한 어느 교사의 질문을 받고 "한국을 방문하고 싶으면 독립운동을 하다 돌아가신 분들을 찾아가서 진심으로 사과했으면 좋겠다"며 "통석의 염(念)이니 하는 단어 하나 찾아서 올 것이라면 올 필요 없다"고 답했다. 이 발언은 바로 나흘 전인 8월 10일 그의 독도 방문에 대한 질문 답변 과정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 발언이 나온 직후 청와대 참모진이나 당국자들은 크게 당혹했다. 당시 참모들은 "교원대 방문에 외교안보수석이나 정무·홍보수석 등이 동행하지도 않았고 MB가 그런 발언을 할 줄 전혀 예상하지도 못했다"며 그 발언은 '우발적'이었고 '오발탄'이었다고 대통령 발언에 관한 언급치고는 강한 표현을 썼다. 당시 일부 보도에 따르면 MB가 독도 방문에 대한 여론 반응이 긍정적이자 아주 기분이 고양된 상황이어서 "굳이 안 해도 될 말까지 했다"는 것이다. MB 자신도 3개월쯤 지나 방한한 일본 아소 다로(麻生太郞) 전 총리(현 부총리)에게 "그런 의도가 아니었다"고 애써 해명하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이명박 전 대통령의 발언은 정부 내에서 논의되고 합의되고 계획된 것이 아닐 뿐 아니라 MB 자신까지도 한발 뒤로 물러선, 일종의 '해프닝' 같은 것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다. 이런 사정임에도 일본이 1년이 넘은 지금까지 이것을 문제 삼고 있는 것은 우리 쪽에서 볼 때 일본 정치권이 이 발언을 일본 부흥에 '이용'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또한 MB의 일왕 사과 요구가 박근혜 정부에 그대로 승계됐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일본도 아베 정권의 대한(對韓) 식민 지배에 대한 인식이 과거 무라야마 내각 때와 크게 다르듯 한국도 정권과 대통령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번 경우도 현 정부의 태도를 확인하는 것이 우선 아닌가?

사실 한국인은 내각마다 다른 소리를 해서 헷갈리게 하는 일본의 '게임'에 크게 식상해왔다. 그래서 정권이 아니라 '국가'의 목소리를 듣고 싶은 심정이 있고 국가의 수장인 일본 국왕의 '의사 표시'로 과거를 매듭지었으면 하는 측면이 없지 않다. 어쩌면 MB의 발언도 그런 심경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임을 일본이 이해했으면 한다. 일본은 정부 대변인의 공식 논평을 통해 한국인 지존의 영웅인 안중근을 '범죄자'라고 하는 보복성 발언을 했다. 우리는 과격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일본인 누구를 지칭해 전쟁범죄자라고 하지 않았다. 우리는 지금 되로 주고 말로 받은 기분이다.

일본의 일부 지식층과 고위 관료층은 한국이 위안부 문제 등 일본의 식민 지배 때 있었던 일들을 국제적으로 확대하려는 것이라며 이것을 일본 골탕 먹이기, 망신 주기로 해석해 불쾌하게 여기는 듯하다. 특히 박근혜 대통령이 해외에서 일본의 역사 인식을 언급하는 것을 못마땅히 여긴다는 것이다. 한국이 이런 문제를 한·일 간에 풀려고 노력했지만 일본이 끝내 외면하고 있는 것은 일본도 아는 사실이다. 우리가 이를 무턱대고 국제화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한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문제를 국제 무대로 끌고 가고 있는 것은 일본이다. 최근 일본 군대의 집단 자위권 개념을 확대하면서 그럴 경우 가장 큰 잠재적 피해자가 될 수도 있는 한국을 건너뛰어 미국 등 서방국가로 이 문제를 국제화, 블록화하고 있는 것이야말로 일본의 독선이다. 한반도 유사시 일본군의 한반도 진출이 거론되는 마당에 우선적으로 우리와 상의하고 우리의 이해 내지 동의를 구하기는커녕 미국 등을 등에 업고 위세를 과시하는 듯한 일본 정부의 태도는 솔직히 100년 전 일본의 제국주의를 연상시킨다.

오늘의 일본은 적어도 한국에 관한 한, 대한제국의 황제를 폐위하고 황후를 시해하고 수많은 한국인을 도탄에 빠뜨린 원죄를 편리하게 잊어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설혹 오늘의 한국 측에서 다소 과격한 발언이 나왔다고 하더라도 역사 인식이 있는 일본인이라면 그 정도는 감내하는 것이 도리가 아닌가? 물론 한국도 어제의 피해를 영원한 빚으로 삼는 발언과 행동을 하는 것이 결코 성숙한 태도가 아님을, 이제는 국제 대열에 선 나라와 국민과 지도자로서 걸맞은 것이 아님을 숙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제 한국과 일본은 서로가 더 잘났다고 과시하고 시기하고 다투는 차원이 아닌, 이웃으로 서로 존중하고 경쟁하며 공생하는 사이로 가는 것이 시대적 요청이다. 그런데도 요즘 한국인들은 일본, 중국, 미국의 군사력 확충 경쟁에서 '100년 전 한반도'의 재생(再生)을 두려운 심경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