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부부와 빌 클린턴 전 대통령 부부가 케네디 서거 50년을 이틀 앞둔 20일(이하 현지 시각) 버지니아주 알링턴 국립묘지에 있는 존 F 케네디(JFK) 전 대통령의 묘역 앞에 나란히 섰다. 제35대 대통령 케네디는 1963년 11월 22일 댈러스에서 카퍼레이드 도중 리 하비 오스왈드의 총탄에 맞아 숨졌다.

전·현직과 차기 유력 후보 함께

CNN 등 현지 언론은 이날 참배 현장을 생중계하면서 "전직 대통령과 현직 대통령, 잠재적 미래 대통령(힐러리 클린턴)까지 케네디를 추모하려 모인 놀라운 날"이라고 전했다. 오바마와 클린턴 두 부부는 케네디 전 대통령과 부인 재클린 묘역에 헌화한 뒤 묵념했다. 케네디의 유일한 외손자이자 주일(駐日) 미국 대사 캐럴라인 케네디의 아들인 존 슐로스버그(20·예일대 재학)와도 악수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부부(왼쪽 두 사람)와 빌 클린턴 전 대통령 부부가 버지니아주(州) 알링턴 국립묘지에 있는 케네디 묘역에 20일 나란히 서서 참배하고 있다. 22일은 케네디가 암살된 지 50년이 되는 날이다.

빌 클린턴과 오바마 모두 케네디와 인연이 각별하다. 클린턴은 고교 시절 백악관에 초청돼 케네디와 악수한 뒤 대통령의 꿈을 키웠다. 케네디 암살 당시 두 살배기였던 오바마는 작년 대선에서 캐럴라인 케네디를 대선 캠프에 합류시켜 케네디 향수를 간직한 지지층을 대거 끌어모으는 후광(後光) 효과를 봤다.

오바마는 이날 하루를 온전히 케네디 추모 행사로 보냈다. 오전엔 백악관에서 올해 '자유의 메달(Medal of Freedom)' 수상자인 빌 클린턴, 토크쇼 진행자 오프라 윈프리 등 16명에게 상을 수여했다. 케네디는 미 대통령이 민간인에게 주는 최고 훈장인 이 메달을 제정했다.

◇"호사 버리고 바람과 맞섰다"

오바마 대통령은 이날 저녁 워싱턴DC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에서 행한 자유의 메달 역대 수상자 초청 만찬 연설에서도 케네디의 유산(遺産)을 높이 평가했다. "케네디는 불가능한 일에 맞서 싸웠다. 호화로울 수 있었던 삶을 버리고 각축장에서 지냈고 우리에게 새로운 세상을 남겼다." 46년 6개월 불꽃 같은 생애와 2년 10개월 짧은 재임 기간에 녹아 있는 JFK의 강단 있는 리더십, 국민을 하나 되게 한 구심력과 도전 정신을 농축한 헌사였다.

JFK는 외교적 도전들을 정면 돌파했다. 1962년 소련이 핵 탄도미사일을 미국 목전인 쿠바에 배치하려 하자 군함을 보내 운반선을 막았다. 미국은 쿠바를 침략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는 대신 쿠바에서 소련 미사일·폭격기를 철수시키기로 흐루쇼프 소련 지도자와 극적으로 타협해 '쿠바 미사일 위기'를 끝맺었다.

제프리 삭스 미 컬럼비아대 경제학과 교수는 최근 CNN 기고문에서 JFK가 "10년 뒤 인간을 달에 착륙시킨 뒤 무사 귀환시키겠다"(1961년 5월)며 유인 달 탐사 계획을 발표한 순간은 "오늘날까지도 우리가 비관주의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영감을 주는 발언"이라고 했다. 달 탐사는 그의 사후(死後) 실현됐지만, JFK가 위대한 약속과 원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실천한 지도자라는 것은 국민 마음속에 남았다. 케네디는 평화봉사단을 창설해(1961년 3월) 국민에게 봉사와 도전 정신을 심어주고 이를 개발도상국 원조와 연결했다. 중남미 20여국과 '진보를 위한 동맹'도 결성했다.

미국인들에게 케네디란 이름은 참신함과 자유, 역동성과 미래를 의미한다. 케네디는 재임 중 지지율 70% 안팎을 기록했다. 최근 미국민 대상 역대 대통령 인기 조사(갤럽)에서도 74%가 '탁월하거나 평균 이상 업적을 남긴 대통령'으로 꼽아 드와이트 아이젠하워(1953~61년 재임) 대통령 이후 역대 대통령 11명 중 압도적인 1위를 기록했다.

복지와 평등 기틀 마련

뉴 프런티어 정신을 내걸고 당선된 JFK는 취임사에서 "국가가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묻지 말고, 국가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물어라"는 명언을 남겼다. 뛰어난 언변과 매력적 아내(재클린), 비극적 최후는 케네디 신화의 한 요인이다. 하지만 전설은 JFK 스스로가 만든 것이었다.

JFK는 인종·종교·국적에 따른 차별을 철폐하기 위해 포괄적 민권법안을 제안했다. 이 법안은 케네디 사망 이듬해인 1964년 7월 통과됐다. 그는 에이브러햄 링컨 이후 흑인 인권 조항을 위해 주어진 권한을 최대한 쏟아부은 첫 대통령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