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31일 평양시 중구역에 있는 노동당사에 장성택·김경희·최룡해·김영남 등 북한의 핵심 실세 120여명이 모였다. 김정은은 이날 북한의 실질적 통치 기구인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소집해 핵 무력, 경제 건설 '병진(竝進)' 노선을 발표했다. 할아버지 김일성의 '주체(主體)', 아버지 김정일의 '선군(先軍)'에 이어 김정은 시대의 통치 기조로 '병진'을 선언한 것이다.

◇권력 유지를 위한 타협의 산물

하지만 북한 스스로도 병진 정책의 실현 가능성이 불투명하다는 점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있다. 북한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지난 4월 5일자에서 "핵 무력 건설과 경제 건설을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은 간단치 않지만 신심이 확고한 투쟁이다"라고 썼다. 한·미를 비롯한 국제사회도 병진 정책은 절대 성공할 수 없고, 핵을 포기해야만 대화를 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그런데도 김정은이 '병진'을 택하고 또 밀고 나갈 수밖에 없는 배경은 무엇일까.

우선 김정은 권력의 기반이 '세습'이라는 점 때문이다. 김정은은 자신에게 '왕좌'를 물려준 아버지 김정일이 내세운 선군 사상의 계승자 역할을 해야 한다. 한편으로는 자기 시대에 맞게 새로운 경제 발전을 동시에 이뤄내야 한다. 이런 처지 때문에 핵과 경제를 병행하는 전략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김정은 분야별 공개활동. 김정은 공개활동 수행인물.

김정은이 현재 북한 내부의 권력 구조상 어쩔 수 없이 병진 노선을 택했다는 관측도 있다. 장성택을 중심으로 경제를 주도하는 당(黨)과 최룡해를 주축으로 핵을 운용하는 군(軍) 사이에서 불안정한 권력을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이 둘을 동시에 안고 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장성택을 중심으로 하는 척신 세력, 최룡해를 대표로 하는 훈신 세력, 그리고 김정은이 '타협한 산물'이 병진 정책이라는 것이다.

◇당과 군 사이 오락가락

김정은의 당·군 사이 줄타기는 그의 정책 결정 과정에서도 나타났다. 김정은은 집권 이후 군부의 힘을 빼기 위해 노력해왔다. 지난해 7월 군부 1인자였던 리영호를 숙청한 후에도 김격식·현영철 등 군 원로에 대한 지속적 인사 조치를 통해 군부를 약화시켰다. 비대해진 군부를 통제하는 목적 외에 '선군'을 내세우던 아버지와 달라 보이게 하겠다는 의도도 깔려 있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북한 체제를 '김정은 버전'으로 바꾸기 위한 포석인 셈이다.

그러나 지난해 말과 올 초 장거리 로켓 발사와 3차 핵실험, 이어진 개성공단 폐쇄 등 강경 국면에서는 군부의 손을 확실히 들어줬다. 북한 사정에 정통한 정부 소식통에 따르면 "당시 김정은이 대외 관계와 관련해 당·정·군에서 올라온 여러 보고서 중 군부 것을 채택했던 것 같다"고 했다. 이 소식통은 "아버지 김정일은 각계에서 여러 보고서가 올라오면 본인이 이를 중재하는 안을 만들어 시행했지만 김정은은 보고서 중 어느 하나만 택하는 방식으로 해왔다"며 "아직 정책 조정 능력이 미숙하다는 점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8월 개성공단 정상화 이후로는 다시 당의 목소리가 커졌다는 분석이 나왔다. 김정은은 8월 25일 제53주년 '선군절(先軍節)'을 맞아 '당에 의한 군 통제'를 강조했다. 김정은은 직접 쓴 '노작'을 통해 "당의 영도는 인민 군대의 생명"이라며 "당의 두리(주위)에 군대와 인민을 하나로 묶어야 한다"고 했다.

◇당분간 '불안한 동거' 이어질 듯

전문가들은 김정은이 유일 지배 체제를 확립하기 전까지는 당과 군 사이에서 계속 오락가락할 가능성이 높고 병진 정책도 유지될 것으로 관측했다. 김용현 동국대 교수는 "지금은 김정은 1인 체제로 가기 위한 징검다리 같은 구도"라며 "당분간은 당 우위라고 해서 군을 홀대하거나 역할을 완전히 축소하면서 당을 강화하는 식으로는 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호열 고려대 교수는 "김정은 입장에서는 인민들이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 민심을 얻고 유일 지배를 공고화하려 할 것이고 한편에선 그 배경으로 핵 능력을 계속 발전시키려 노력할 것"이라고 말했다.

켄 고스 미국 해군분석센터(CNA) 국제관계국장은 지난 9월 아산정책연구원 세미나에서 "김정은이 최고 지도자로서 지위를 확립해 정책 입안과 결정을 독자적으로 하는 단계는 오는 2015년쯤에야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