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을 순방 중인 박근혜 대통령에게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준 훈장 이름이 좀 코믹합니다. '바스 대십자 훈장'(Grand Cross of the Order of the Bath). 외국 정상에게 주는 최고 훈장에 '목욕(bath)'이란 단어가 들어 있습니다. 실제로 이 훈장의 명칭은 과거 기사들이 왕에게 충성 맹세를 하기 전 몸을 씻은 데서 비롯됐다고 합니다.
런던 서쪽 170㎞ 지점에는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고도(古都) 바스(Bath)가 있습니다. 목욕을 즐겼던 고대 로마인들은 영국을 점령한 뒤 바스에서 온천수가 나오자 커다란 노천 목욕탕을 지었습니다. 그러니 바스는 역사·지리적으로 목욕과 뗄 수 없는 관계이지요.
바스는 영문학에서도 빛나는 이름입니다. '캔터베리 이야기'는 14세기 시인 제프리 초서(Chaucer)가 쓴 중세 영문학의 보배입니다. 바스는 여기 수록된 '바스의 여장부 이야기'(The Wife of Bath's Tale)의 무대입니다. 주인공 여성은 시대의 가혹함에 눌려 잔뜩 웅크리고 살던 당시의 중세 여성들과 딴판입니다. 그녀는 남편이 죽을 때마다 수절을 거부하고 새 남자 찾기를 거듭한 끝에 다섯 번이나 결혼했습니다. "하느님이 자식 낳아 번성하라고 하지 않으셨느냐?"고 떳떳하게 주장했지만 실제론 자식을 낳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하느님 말씀은 핑계일 뿐, 남자랑 행복하게 살겠다는데 뭐가 문제냐고 생각하는 근대적 의미의 '개인'입니다. 아들뻘인 다섯 번째 남편과는 치열한 주도권 싸움도 벌입니다.
여러 해 전 옥스퍼드대학을 방문했다가 '캔터베리 이야기' 필사본을 직접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당시 만났던 교수가 "서울에서 온 손님에게 보여줄 게 있다"며 한 서고(書庫)로 저를 안내하더니 이 고서의 필사본을 꺼내 조심스레 펼쳐 보였습니다. 뜻밖의 선물을 받은 것처럼 가슴이 뛰었습니다. 중세 영어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는 소중한 작품이라는 설명도 들었습니다. 영국 문학사의 업적을 자랑하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훈장 명칭 하나에도 문화의 성과를 담고 알리는 노력, 우리도 적극적으로 해봤으면 합니다. 우리 문화 관련 훈장에는 금관·은관·보관 같은 명칭을 쓰는데, 특징이 없고 좀 밋밋해 보입니다. 훈민정음이나 고려청자 같은 문화유산 명칭을 적절히 변용해 쓰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