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부가 실시한 서독 파견 광부 1차 시험에서 4대1의 경쟁을 뚫고 765명이 합격했음을 알린 조선일보 1963년 9월 17일자 사회면 톱기사 제목은 "어두운 취직 전선, '좁은 문'에 우는 '사회 입문'"이었다. 국영기업과 은행 및 일반회사 모두가 극심한 운영난으로 14개 4년제 대학과 38개 초급대학 졸업 예정자 3만7000여명의 구직 경쟁이 어느 해보다 더 치열할 것으로 예상된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나라는 가난했고 국민은 배고팠다. 인구 2400만명에 실업자는 250만명이 넘었으며, 종업원 200명 이상 기업이 54개, 1인당 국민소득도 87달러에 지나지 않았다. 대학물 먹은 이가 20%나 되어 '신사 광부'로 불린 파독(派獨) 광부 1진 123명의 출국을 전한 조선일보 1963년 12월 22일자 기사가 잘 말해주듯, 산업화 태동기(胎動期)에 월급 162달러 50센트는 만리타향 지하 갱도에서 힘에 벅찬 육체노동을 감내케 하기에 충분했다.
"승강기를 타고 지하 1200m까지 내려가면, 동쪽으로 걸어서 다시 1㎞, 다시 이곳에서 작업복을 벗어놓고 팬티 바람으로 일할 준비를 완전히 갖춥니다. 옆구리에 찬 안전등과 가스방지필터를 점검해야 하고, 작업용 가죽 장갑을 낀 손에는 두 개의 물통과 망치를 들고 무릎에는 무릎 덮개를 씌워 묶어 가지고는 15도 경사 길을 다시 아래로 500m쯤 내려가야만 바로 막장에 들어서게 되는데, 이미 온몸은 땀에 젖어버렸고 팬티에서는 땀이 뚝뚝 떨어집니다."('서독의 한국인', 1971) 높은 인구 증가율과 실업률, 그리고 외환 부족에 시달리던 1970년대 말까지 독일로 간 8300여명의 광부와 1만3000여명의 간호사가 피땀 흘려 벌어들인, GNP의 2%에 달한 연간 5000만달러의 외화는 조국 산업화에 새 움이 트게 해준 한 바가지 마중물이었다.
경제성장의 숨은 견인차였던 파독 광부와 간호사들의 희생에 대한 기억은 호구지책(糊口之策) 마련에 마음을 끓이며 간난(艱難)의 시대를 살던 '그때 거기'와 코리안 드림을 품고 건너온 이들과 더불어 사는 다문화 사회를 맞은 '지금 여기'를 함께 비추는 양면 거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