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 연속극을 보는 여인 위로 덮치듯 투사되는 폭력사태 영상, 갈빗살이 놓일 자리에 면도칼을 사슬처럼 이어붙인 침대, 불교 탄압에 맞선 스님의 형상을 새겨넣은 야구방망이, 똑같이 이슬람 전통 의상을 입었지만 중국인과 인도인으로 나뉜 두 가족사진….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 현대미술은 두 겹이다. 진부한 것 같으면서 낯설고 평온해 보이지만 격렬하다.
30일 홍콩에서 개막한 전시 '국가는 없다(No Country)'는 서양이 귀담아듣지 않았던 남아시아 및 동남아 현대미술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미국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과 스위스 금융기업 UBS, 두 '빅 네임(Big Name)'이 기획하고 후원한 이 프로젝트는 사실 꺼림칙한 항해와 같았다. '그 낙후된 땅에 재능이 있을까?' '헛돈 쓰는 게 아닐까?' 같은 의심이 출렁였던 것이다.
◇변방의 현대미술, 건강한 상상력
태국 작가 아라야 라잠린수크가 만든 영상 '달의 배반(背反)'은 픽션과 논픽션의 충돌이다. 화면에 등장하는 그는 TV 연속극을 보며 개 두 마리에게 밥을 주고 있다. 음악도 쾌활하다. 하지만 어둠을 들춰내는 달처럼, 태국에서 일어난 시위대와 경찰의 충돌 영상이 화면 전체에 겹쳐지면서 평온은 산산조각이 난다.
타예바 리피(방글라데시)의 설치미술 '사랑 침대(Love Bed)'는 매혹적이면서 위협적이다. 1947년 인도로부터, 1971년엔 파키스탄으로부터 분리 독립한 방글라데시의 역사를 침대로 압축했다. 이 침대는 연인과 더불어 쉬는 안식처가 아니다. 날카로운 면도칼 위에 몸을 눕혀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마저 견딘다는 점에서 강인한 집념으로도 읽힌다.
전시실 끝에는 트루옹 탄(베트남)의 유화 '우리는 뭘 바라나'가 질문처럼 놓여 있다. '국가는 없다'가 그러모은 남아시아와 동남아 현대미술가 13명의 작품 18편 가운데 화사한 색감으로는 으뜸. 하지만 캔버스 속 남자는 손발에 못이 박혀 있고 캔버스도 통째로 밧줄에 묶여 있다. 보수적인 베트남 사회에서 작가가 체감하는 압박을 그렸다는 해석은 그가 동성애자라는 정보가 더해지며 즉물적으로 다가온다.
전시를 들여온 아시아소사이어티 홍콩센터의 앨리스 몽 행정감독은 "친숙함과 낯섦이 뒤섞여 있지만 관통하는 공통점을 꼽으라면 '건강한 상상력'"이라며 "뒤엉킨 역사를 가졌고 개발은 덜 된 땅의 작가들이 현대미술의 본질을 정직하게 일깨워준 셈"이라고 했다.
◇구겐하임과 UBS의 항로 개척
'국가는 없다'는 구겐하임 미술관과 UBS가 앞으로 5년간 펼칠 'MAP 글로벌 아트 프로젝트' 삼부작 중 첫 결실이다. 그들은 지도부터 펼쳤다. "우리가 아직 조명하지 못한 아티스트가 있는 지역을 찾아라." 남아시아 및 동남아시아, 라틴 아메리카, 중동 및 북아프리카가 그 답이었다. 리처드 암스트롱 구겐하임 미술관장은 "모든 미술관에는 소장 욕망이라는 DNA가 있는데, 금융 위기로 후원이 위축될 때 UBS가 손을 잡아줬다"고 했다.
비즈니스에 공짜는 없다. '아트 바젤' 등을 후원해온 UBS는 허투루 돈을 대지 않는다. 스티븐 매큐브리 UBS 미술 담당 큐레이터는 "UBS는 유명 작곡가가 대부분 죽은 클래식과 달리 '살아 있는' 현대미술의 파트너가 되고 싶다"고 했다.
이번 전시작 중 투안 응구엔의 '적의 적(Enemy's Enemy)'은 숭배받는 베트남 스님의 형상을 미국산 야구방망이에 조각해 넣었다. 지난 28일 만난 작가는 "베트남 전쟁에서 적(敵)인 미국을 물리친 공산 정권이 불교를 적으로 돌린 패러독스를 그렸다"고 했다. 작품 아래 컨텍스트(맥락)를 읽는 재미를 불편해할 관람객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국가는 없다'는 미술과 비즈니스가 효율적으로 공존하는 모델을 보여준다.
전시는 내년 2월 16일까지 아시아소사이어티 홍콩센터에서 열린 뒤 싱가포르로 간다. 18세 이하는 국적 불문하고 무료. 온라인(www.asiasociety.org.hk) 감상도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