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철 문화부 차장

1930년대 중국의 민주당파 인사들과 학생들 슬로건은 '내전 중지, 일치 항일'이었다. 장제스(蔣介石)의 국민당 정부에 대해 공산당 토벌을 중단하고 일본과 맞서 싸우라는 주장이었다. 항일전쟁이 끝난 1945년 후반 '내전 중지, 화평 담판'으로 구호가 바뀌었다. 국민당 정부에 비해 군사적 열세에 있던 마오쩌둥(毛澤東)은 이들의 주장에 동조하고 나섰다. 마오는 '정치협상회의'를 통해 각 정파가 참여하는 '연합정부'를 구성하겠다는 공약을 내놓았고,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를 약속했다.

1948년 중반 공산당의 군사력이 장제스 군대보다 우세해지자 내전 반대를 외치던 지식인들의 목소리가 잠잠해졌다. 공산당이 손을 쓰기도 했지만, 국민당 정부의 부패와 무능, 특히 화폐개혁 실패에 따른 인플레이션 때문에 민심이 완전히 돌아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관성을 '포기'한 지식인들의 운명은 비참했다. 마오의 공약은 부도수표로 드러났고, 1957년 반(反)우파투쟁으로 50만명이 넘는 지식인들이 숙청됐다. '독재자' 장제스 치하에서도 비판의 자유는 보장됐으나 마오의 인민공화국 아래에선 입도 한 번 뻥긋 못한 채 제거된 것이다.

중국 지식인의 비극을 떠올린 것은 최근 교육부의 수정 권고를 받은 고교 한국사 교과서 때문이다. 교육부는 해방 후 정치사를 다룬 교과서 8종 모두 분단의 책임이 남한에 있는 것으로 오인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1990년대 기밀 해제된 옛 소련 비밀문서를 통해 한반도에서 먼저 단독정부 수립에 나선 것은 이승만이 아니라 소련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 지 이미 오래다. 이승만의 정읍 발언보다 앞서는 1946년 2월 사실상 정부 기능을 한 북조선 임시위원회를 출범시킨 게 대표적이다.

일부 교과서 집필자들과 현대사 연구자들은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의미를 깎아내리면서 남북이 갈라진 것만 부각시킨다. '한반도에 두 개의 정부가 들어서다'는 제목을 단 한 교과서가 대표적이다. 이들은 당시 국제 정세로 볼 때 불가능했던 '남북 협상에 의한 통일정부 수립'이라는 우상(偶像)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 같다.

소련이 배후 조종한 김일성 정권이 남북협상을 통해 통일 정부에 참여했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마오쩌둥이 그랬던 것처럼 권력을 장악한 후 가장 먼저 손볼 대상은 교과서 집필자 같은 지식인이었을 것이다. 김일성의 북한 정권이 1950년대 내내 남로당을 비롯, 연안파·갑산파·소련파를 제거한 숙청의 역사가 이를 뒷받침해준다.

미래 세대에 대한 역사 교육은 '희망 사항'이 아니라 현실에서 벌어진 사건 중심으로 당시 상황에서 무엇이 최선이었는지를 따져 묻는 현실감을 지녀야 한다. 대한민국은 출범 초 흠집 많고 위태로워 보였지만 자유민주주의를 선택한 덕분에 민주화와 산업화를 이룬 성공의 역사를 쓸 수 있었다. 삼척동자도 뻔히 아는 일을, 일부 교과서 집필자와 현대사 연구자들만 외면하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