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베르베르의 '개미'가 한국에 번역 출간된 지 20년이 되는 해. 그의 책을 즐겨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듯이 나 역시 '개미'를 통해 그를 만났다. 생물 진화의 정점으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한 인간의 문명과 문화라는 것이 우리만의 독보적 업적이 아님을 나는 '개미'를 통해서 깨달았다. 진화는 목표가 정해진 진보가 아니라 다양성의 창궐이었다. 우주에서 가장 복잡한 구조물이라는 인간의 뇌도 그다지 대단한 자랑거리는 아니었다. 개미는 각 개체가 뉴런처럼 기능함으로써 집단 전체가 하나의 뇌처럼 작동하고 있었으니까. 그의 책은 나를 겸손하게 해주었다.
'개미'가 출간된 지 20년. 결코 짧지 않은 세월 동안 베르베르는 개미처럼 꾸준히 작품을 발표해 왔고 독자의 사랑도 꾸준히 이어져 왔다. 나는 그의 오랜 애독자 중 한 명이다. 그의 매력이 무엇인지 생각해 본다. 베르베르의 작품에는 자신만의 스타일이 있다. 두 가지 스토리를 병행하여 이끌어가고, 중간 중간 통찰이 담긴 지식을 전달하는 정류장을 가지고 있다. 한 권을 읽으며 책 세 권을 읽는 보람을 주려는 걸까? 등장인물 역시 작품을 넘나들며 대대손손 이어져 낯설지 않다. 자신의 창조물을 토사구팽하지 않고, 족보를 만들어 가며 그들의 삶을 이어가게 해주는 그의 자식 사랑이 밉지 않다.
통섭이 유행인 시대다. 과학과 인문학의 결합이 통섭이라면 베르베르야말로 통섭의 작가라고 생각한다. 그의 이야기 속에는 생물학, 물리학, 생태학, 인류학, 역사학, 신화학 등이 버무려져 있다. 과학 책은 세계의 진실을 엿보게 해주지만 나무토막 맛이 나고 불친절하다. 소설은 재미있지만, 사실도 아닌 허구에 내 정신 에너지를 소비하는 것이 아까울 때가 있다. 그런 나에게 베르베르의 책은 맛 좋고 영양 많은 오리고기다.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가 너무나 순수한 사람이어서 그렇겠지만 가끔 유치한 대사가 나로 하여금 오그라들게 한다. 깨달음을 얻은 선구자가 광야에서 울부짖을 때도 있다. 지하철역에서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사람처럼, 그러나 정반대 위치에서 비슷한 구호를 외친다. 인류를 구원할 것은… 오직, 사랑뿐…! 오글오글… 하나 어쩌랴? 틀린 말은 아닌 것을.
베르베르의 신작이 나왔다. 신화와 역사, 환경과 종말론, 정치와 종교, 진화와 창조, 신과 생명공학 등이 담긴 베르베르식의 우화이자 과학소설이다. 전작들에서 이어져 온 베르베르의 세계관이 이번 책에서 어떻게 변이, 진화했을지 궁금해하며 책을 펼쳐든다. 문득 '신'의 마지막 장면이 떠오른다. 신 중의 신, 신 위의 신을 찾아가는 신 후보생들이 최종 모험에서 바로 그 책을 읽고 있는 독자와 만나는 장면이다. 그때 종이의 평면에서 글자가 일어서고 등장인물들이 튀어나오는 것을 나는 분명히 보았다. 동시에 나는 '끈이론'을 떠올렸다. 막 사이를 자유롭게 오가는 중력의 끈들…. 막을 이탈한 끈들과 종이를 이탈한 글자들이 내 뇌로 침투하는 순간 나는 희열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