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 나 노래해야 해, 씨발."
술에 지쳐 이미 제 기능을 잃어버린 간은 목소리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배에 복수가 차올라 힘을 받지 못한 소리는 거칠고 쩍쩍 갈라졌다. 그가 두려워하는 것은 죽음이 아니었다. 목숨보다 사랑하는 노래를 부를 수 없는 것이었다. 그에게 "나 노래해야 해"라는 말은 "나 살고 싶어"라는 말보다 더 절박한 생에 대한 의지였다.
절규하듯 토해낸 '내 사랑 내 곁에'를 우리 곁에 남겨놓고 전설이 된 가수 김현식(1958~1990). 그가 죽은 후 '내 사랑 내 곁에'를 타이틀곡으로 한 유작앨범은 500만장이 팔리며 전국을 뒤덮었다. 1990년 11월 1일 서울 용산구 동부이촌동 집에서 간경변증으로 서른셋의 삶을 놓을 때까지 그는 기타를 놓지 않았다. 병원에 입원해서도 곡을 만들고 가사를 입히고 카세트테이프에 그 노래들을 녹음했다. 음악 교육을 정식으로 받아본 적이 없던 김현식은 작곡을 할 때 악보를 사용하지 않았다. 기타를 치면서 곡을 만들고 그 노래가 몸에 체득이 되면 테이프에 녹음을 했다.
투병 중이던 김현식이 병상에서 거친 육성으로 부른 미발표 노래 9곡이 발견됐다. 김현식의 죽음과 함께 카세트테이프에 묻혀 있던 곡들은 그동안 존재 자체도 알려져 있지 않았다. 9곡 모두 김현식 작사·작곡이다. 그중엔 죽기 1~2주 전에 부른 노래도 있다. '외로운 밤이면' '그대 빈 들에' '나루터에 비 내리면' '수' '이 바람 속에서' '나는 바람 구름' '지난 가을에' '내 사랑 어디에' '나 외로워지면' 등 김현식의 목소리로 듣는 9곡의 노래들은 23년의 세월을 건너뛰어 마치 그가 우리 곁에 돌아온 듯 생생하다. 특유의 블루스 선율에 담긴 '그대 빈 들에'처럼 김현식을 진하게 느낄 수 있는 곡들과 함께 '모든 욕망으로부터 벗어난 투명하다시피 스산한 내면의 풍경을 보여주는'(음악평론가 강헌) 발라드 '나루터에 비 내리면'처럼 뜻밖의 김현식을 만날 수도 있다. 숨을 쥐어짜듯 힘겹게 올라가는 고음, 목이 막혀 노래 중간중간 내뱉은 헛기침, 병상 주변의 소음 등은 짧은 인생의 마지막 노래들이라는 사실을 일깨운다.
미발표 노래를 찾아내 세상에 내놓으며 김현식을 우리 곁으로 불러들인 이는 김현식이 "대장"이라고 부르던 동아기획(현 동아엔터테인먼트)의 김영(64) 사장이다. 김현식은 자신이 만든 노래가 완성되면 카세트테이프에 담아 소속사 사장인 '대장'에게 가져왔다. 둘은 자동차 안이나 아무도 없는 곳을 찾아 테이프를 들으며 곡 선정 작업을 했다.
김영은 1980~1990년대 대중가요에 굵직한 이름을 남긴 대표가수를 숱하게 만들어낸 '미다스의 손'이었다. 김영과 동아기획은 방송이 아닌 콘서트로, 보여주기가 아닌 음악 자체만으로 대중을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인 언더그라운드의 대부요 메카였다. 김현식을 비롯 조동진, 들국화, 한영애, 봄여름가을겨울, 김현철, 이소라, 박완규, 장필순, 시인과촌장 등 탄탄한 실력과 다양한 장르로 진용을 갖춘 김영 사단은 '대중가요의 르네상스'를 이끌어냈다. 당시의 김영은 현재 'SM엔터테인먼트 이수만' 이상의 존재였다. 가수들과 함께 꿈을 꾸었던 그들의 '대장'이었다.
지난 10월 11일 김현식의 미발표곡 9개 트랙이 담긴 앨범 '2013년 10월 김현식' 공개를 1~2주일 앞두고 김영 사장을 만났다. 세상은 아직 김현식의 새 앨범 소식을 모르고 있었다. 서울 여의도의 한 오피스텔에 있는 동아엔터테인먼트 사무실은 작고 초라했다. 2003년 음반 시장 몰락과 함께 '동아기획'도 '김영의 신화'도 과거형이 됐다. 사무실 창밖으로는 한강이 무심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시대의 변화와 세월의 흐름을 받아들인 얼굴이었지만 카랑카랑 카리스마 있는 목소리는 '아직 나 살아있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는 아직도 김현식의 추억을 붙들고 살고 있었다. 그에게 김현식은 많은 가수들 중에서도 특히 '아픈 손가락'이었다고 한다. 두 시간여로 계획하고 오후 2시30분에 시작한 인터뷰는 장소를 옮겨가며 밤 10시가 훌쩍 넘어서 끝났다. 서울 종로구 인사동의 한 골목, 들국화의 '행진'과 김현식의 노래가 흘러나오는 작은 카페에서 김현식과의 추억은 끝없이 풀려 나왔다.
이번에 발견된 김현식의 미발표곡은 먼지에 덮인 채 하마터면 빛을 못 볼 뻔했다. 그의 방에는 김현식뿐만 아니라 다른 가수들의 녹음테이프 수백 개가 쌓여 있었다. 몇 개의 테이프에 나눠 담겨 있던 미발표곡들은 김현식이 떠난 이후 책상 깊숙이 치워져 있었다. 마음의 준비도 할 새 없이 서둘러 떠난 김현식의 생각이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것도 힘들었고 김현식의 노래를 듣는 것도 버거웠다. 기억 속에 묻어 두었던 김현식의 테이프를 다시 꺼내들기까지는 20여년의 세월이 걸렸다. 음악 시장의 급격한 변화와 함께 그도 의욕을 잃었던 탓이다.
◇ 김현식이 입원했던 병원들에서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한 것이어서 걸음소리 등 주변의 온갖 소음 섞여 있어
2013년 10월, 그는 왜 지금 그 노래들을 세상에 내놓는 것일까. "음반 시장이 몰락하고 한때 자살을 생각할 만큼 힘들었습니다. 2004년 정몽헌과 골프를 쳤는데 이틀 후에 자살했다는 뉴스가 나오는 겁니다. 그때 저도 자살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생각했어요. 그동안 대인기피증 때문에 어디에도 나서고 싶지 않았어요. 항간에는 동아기획이 망했다는 소문이 났지만 음반을 계속 내기는 했어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걷고 또 걸었습니다. 걸으면서 마음을 비우고 나를 극복했어요. 힘들 때마다 현식이 생각을 많이 했어요. 지난해 현식이가 '대장! 이젠 내 노래 좀 내지' 하고 말하는 것 같았어요. 때가 됐다는 생각이 들어 1년 동안 준비를 해왔습니다."
김현식의 노래와 함께 그도 세상으로 걸어 나온 것이다.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는 9곡을 비롯해서 음반에 들어가는 곡은 모두 21곡. 모두 김현식이 입원을 했던 백제병원(서울 한남동)과 금강병원 등에서 카세트테이프에 녹음한 탓에 주변의 온갖 소음이 섞여 있다. "아무 장치 없이 그냥 가정용 녹음기에 통기타 치면서 부른 거예요. 화장기 없이 발가벗고 부른 노래인 거죠. 원 소스에는 문 열고 닫는 소리, 밖에서 떠드는 소리가 다 들려요. 최대한 편하게 들을 수 있도록 소음 제거하고 반주 입히는 작업을 계속했어요. 처음 발표하는 9곡 외에 12곡도 지난 앨범에 실렸던 곡이기는 하지만 해석이 다르고 연주가 다르기 때문에 예전과 다른 노래라고 할 수 있어요."
그는 "현식이는 선천적으로 노래하는 방법이 다르다. 목소리가 스피커를 뚫고 나온다"면서 음반에 실린 노래 한 곡을 들려줬다. 거칠고 탁한 목소리가 귀를 때렸다. 절규하듯 외치는 고음은 처절하다. 무엇이 그토록 절실했을까. 몸을 망가뜨리면서 음악에 자신을 내던졌던 무모한 열정이 느껴져 가슴이 뻐근했다.
그는 김현식 음반을 내는 가장 중요한 이유를 "음악의 다양성이 공존하지 못하는 시대에 경종을 울려주고 싶어서"라고 말했다. "아이돌들만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소리가 좋은 사람, 소울(soul)이 있는 노래도 사랑받는다는 것을 현식이가 살아 나와서 보여줬으면 좋겠어요. 현식이 노래를 들어보세요. 소울이 있으니 20년이 넘어도 전혀 트렌드에 뒤떨어지지 않잖아요. 제2, 제3의 김현식이 나와야 합니다."
그가 꼽는 당대 최고의 소리는 전인권, 김현식, 이소라이다. 그는 그중에서도 김현식이 각별한 이유가 "유난히 치대서"라고 말했다. "들국화든 이소라든 계약을 하면 룰대로 가는데 현식이는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왔어요. 새벽 2시가 됐든 3시가 됐든 집으로 쳐들어오는 거야. 자다가 뛰어나가 아파트 근처 놀이터에서 이야기하기도 하고 포장마차에 가기도 하고 그랬어요. 현식이는 밖으로 보이는 모습은 강했지만 나를 찾아와 만날 울었어요. 열 번 찾아오면 아홉 번은 울었던 것 같아요. 가정사를 밝힐 수는 없지만 사연도 많고 상처도 많았어요." 유난히 외로움에 서툴렀던 김현식에게 김영 사장은 대장이었고 형이었고 아버지였다.
그와 김현식의 인연은 1984년부터였다. "노래하겠다"며 고등학교를 중퇴한 김현식은 언더그라운드에서 서서히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할 무렵 대마초에 손을 댔다. 1978년 구속돼 8개월을 살고 나온 후 한동안 힘든 시기를 겪어야 했다. 선배가수 이장희의 주선으로 서라벌레코드에서 첫 음반을 냈지만 여전히 자리를 잡지 못하고 방황을 거듭했다. 그러다 문을 두드린 곳이 당시 들국화를 발굴한 동아기획이었다. 김영 사장은 김현식이 찾아왔을 때 의자에 앉자마자 "이 놈 물건이다"란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김현식뿐만 아니라 수많은 가수들과 계약을 할 때도 오디션을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30분만 이야기해 보면 '될 놈과 안 될 놈' 판단이 섰다고 한다. 그의 '촉'은 정확했다. 김현식은 후배가수들이 꼽는 '가장 닮고 싶어하는 선배'였고 후배들이 넘어야 할 산이 됐다. 최고의 디바로 꼽히는 '누구 없소'의 한영애는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김현식을 일컬어 "듀엣을 하고 싶은 유일한 남자가수였다"고 말했다.
김영 사단에 합류한 후 1987년 김현식은 또다시 대마초를 피우다 구속돼 3년 집행유예를 받았다. 자신이 힘을 쓰면 집행유예를 풀어 줄 수 있었지만 굳이 애쓰지 않았다고 한다. 풀어주면 다시 대마초에 빠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김현식은 대마초 대신 술에 의지하기 시작했고 갈수록 의존도는 심해졌다. 아침에 눈뜨면 마시기 시작해 잠들 때까지 취해 있었다. 그는 왜 그렇게 약과 술에 빠졌을까. 김현식은 유작시 '술'을 통해 이유를 밝혔다.
'술이 뭐지?
마시면 취하는 거지.
취하면 좋아?
이 꼴 저 꼴이 전부 좋은 꼴 같아져.
그럼 술이 깨면 어떡해?
또 마시면 되지.
그럼 자꾸자꾸 마셔야 되니?
그럼 자꾸자꾸 마시지.'
김현식은 자신을 잊기 위해 술을 마셨고 술의 힘을 빌려 음악을 했다. 의사가 "더 이상 술을 마시면 죽는다"고 경고했지만 그는 자신의 몸을 학대하듯 소주를 들이부었다. "머릿속에는 그가 추구하는 음악이 있는데 마음대로 소리가 안 나오니까 미치는 거지. 술을 마시면 소리가 원하는 대로 나올 것 같으니까. 옆에서 아무리 말려도 마셔대는 거예요."
김현식은 맨정신으로 마주 봐야 하는 세상과 자신이 두려웠는지 모른다. 김현식은 여렸다. 김현식은 불쌍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치 못했다고 한다. 길거리 좌판이 있으면 무조건 물건을 사 주고, 모르는 사람이 추운 옷을 입고 떨고 있으면 가죽점퍼를 벗어줬다. 한번은 경찰들이 좌판 단속을 하는 장면을 지나가다 목격했다. 상인들 리어커를 끌어주다 화를 참지 못하고 파출소로 쳐들어가 "왜 단속하느냐"며 한바탕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김현식이 사고를 칠 때마다 수습은 '대장'의 몫이었다.
◇ 김현식 누나에게서 걸려온 전화, 딱 한마디 "갔어요."
김현식은 노래로 세상과 소통했고 노래 속에서 자유로웠다. 그 안에서 외로움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잊었다. 투병 중에도 친한 가수들의 콘서트장에 달려가서 예고도 없이 "나 무대 올라가겠다"고 말하고는 스스로 게스트가 돼서 노래를 불렀다. 김현식의 팬카페에 후배가수 권인하는 이런 글을 남겼다. '현식이형을 맨 마지막에 본 게 세상을 뜨기 일주일 전이었는데 그날도 또 녹음을 하다 방송하러 왔더라고요. 너무 체력이 달려서 노래도 못 부르고 그냥 중간에 그만두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갈 때 "형 어디가?" "어 나 녹음실로 가야지" 결국 죽는 순간까지도 음악 속에 있다가 간 게 아닌가 싶습니다.'
김영 사장은 김현식이 그렇게 빨리 떠날 줄은 몰랐다고 했다. 투병 중이었지만 김현식은 '사랑과 평화'의 원년 멤버 최이철의 곡으로 앨범을 내고 싶다고 해 레코딩 작업을 준비 중이었다. 10개월여 작업 끝에 편곡과 반주가 완성됐다. 김현식의 노래만 입히면 끝났다. 스튜디오를 오가며 키(음높이)를 맞추면서 녹음할 기회를 보던 중이었다. 김영 사장은 매일 찾아가거나 전화로 김현식의 안부를 확인했다. 죽기 하루 전날 김현식의 병간호를 하던 누나로부터 각혈을 했다는 말을 전해들었지만 죽음의 기미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11월 1일 김현식의 누나가 전화를 걸어왔다. 통화는 딱 한마디로 끝났다. "갔어요." 김현식이 그에게 유언으로 남긴 것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후배가수 김장훈을 스타로 만들어달라'는 것과 그의 아들인 완제를 부탁한다는 것이었다. 김현식과 김장훈의 어머니는 절친한 사이였다. 김현식을 형처럼 따랐던 김장훈이 한때 김현식의 집에서 살았던 인연으로 사촌이라고 알려지기도 했다. 김현식은 방황의 시기인 1982년 결혼해 완제를 낳은 후 2년 만에 이혼했다. 김현식의 병간호를 하며 마지막을 지켜줬던 누나가 캐나다에 완제를 데려가 키웠다. 완제는 2010년 가수 데뷔를 했지만 아버지의 벽을 넘지 못했다. 현재는 캐나다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김 사장이 완제의 경제적 지원을 해준 듯했지만 "생색내는 것 같아 말하기 싫다"면서 말을 돌렸다.
김현식의 죽음과 함께 음악의 한 시대도 끝났다. 그는 "현식이가 아픈 몸을 끌고 노래하러 가야 한다고 나서면 아무도 말릴 수가 없었다"면서 "그런 쟁이들이 사라졌다"고 아쉬워했다. "1980년대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다시는 안 올 대중음악의 르네상스기였어요. 그 노래들은 수십 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살아있고 앞으로 수십 년 후에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왜냐하면 이미 고전이 됐고 클래식이 됐기 때문입니다."
그는 요즘 같아선 음반은 만들수록 적자라고 했다. "디지털 음원 수입은 너무 적어 수입이랄 것도 없고 음반은 몇천 장 팔아선 제작비도 안 나와요. 음반 한 장 내면 제작비·홍보비 아무리 적게 잡아도 1억2000만원이 드는데 겨우 2000만~3000만원 건지는 게 고작이에요. 무조건 밑지는 거죠. 그야말로 일하면 손해, 일 안 하고 놀면 버는 거예요. 그런데도 왜 일을 하느냐?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2000년대 들어 소리바다·벅스 등 인터넷 음악서비스 제공 사이트가 생기면서 음반시장에 위기감이 돌았다. 그는 동아기획을 중심으로 SM, 예당, 우퍼, 신촌뮤직, 서울음반 등 8개 대표 음반사의 온·오프라인 유통을 맡는 'IK팝'이라는 회사를 만들었다. 2003년 소리바다·벅스 등에 가입한 회원이 1000만명을 헤아렸다. 2002년 'IK팝'에 소속된 8개 회사 매출이 총 700억원이던 것이 1년 만에 35억원으로 뚝 떨어졌다.
2003년 음반 시장 몰락과 함께 동아기획도, 가수들의 대장 김영 사장도 역사의 뒷길로 물러났다. 한때 400~500개의 팀이 “음반 한번 내게 해 달라”면서 동아기획 앞에 줄을 섰던 풍경은 기억 속으로 사라지고 소속 가수들도 그의 곁을 떠났다. 세상의 인심은 권력과 돈을 좇게 돼 있는 법이다. ‘대장’을 따르던 가수들과는 연락을 하고 지내느냐고 물어보니 그가 “두 부류가 있다”면서 “하나는 아예 못 보는 친구들이 있고, 다른 하나는 꾸준히 찾아오고 안부를 묻고 걱정해 주는 부류가 있다”고 대답했다. ‘못 보는 친구’들은 대답하기 곤란할 것 같아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누가 있느냐고 물었더니 “시인과촌장의 하덕규, 신촌블루스의 엄인호, 박학기, 김현철, 유영석, 권인하도 있고 전인권도 연락을 하고 있다”는 답이 돌아왔다. 박완규는 아직도 음반 계약이 돼 있다.
그는 어쩌다가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의 대장이 됐을까. 그는 경희대 작곡과를 나왔다. 대학을 다니면서 그는 이미 부자가 됐다. 전국에 기타 강습 바람이 불던 1968년부터 1970년까지 서울 충정로, 정동, 합정동 로터리 등 3곳에 기타학원을 차려 떼돈을 벌었다. 그러다 음반 제작에 손을 댔다. “방송국에 홍보를 해야 하는데 영 성격에 안 맞는 거야. 안 되겠다 싶어 레코드가게를 차리고 손님들에게 음반을 사는 이유를 계속 질문했어요. 4년여 질문을 하다 보니 소비자가 뭘 원하는지 알겠더라고요.”
그렇게 키운 안목으로 들국화가 탄생했고 대중가요의 새로운 장이 열렸다. 그는 왜 ‘대장’이라고 불리게 됐을까. “겨우 30대인데 ‘사장님’ 하고 부르니까 영 겸연쩍고 소름 끼치잖아요. 사장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죠. 자기들끼리 회의를 하더니 대장이라고 부르겠대요.” 지금도 가요계 언저리에 있던 사람들은 그를 “대장”이라고 부른다.
‘대장’은 한국 가요사의 황금기를 주름잡았다. 대장을 중심으로 모여든 실력파 가수들은 ‘음악’으로 뭉치고 ‘음악’으로 살았다. 그 음악은 사랑에 비틀거리는 이들에게 위로를 주고 삶의 무게에 지친 사람들을 보듬어 주었다. ‘대장’은 댄스음악이 판을 치는 세상에서 영혼이 있는 음악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고 싶다고 했다. 가짜가 판치는 세상에서 진짜의 힘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2013년 10월, 진짜 노래가 설 자리를 잃어가는 시대에 김현식과 그의 대장이 다시 뭉쳤다.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현식이하고 한번 해보고 안 되면 깨끗이 접을 겁니다.”